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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땅콩회항' 사태부터 노조가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을 <플라이 백>이라는 책으로 담아낸 박창진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태부터 노조가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을 <플라이 백>이라는 책으로 담아낸 박창진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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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 부부장검사가 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박 사무장'이란 호칭이 더 익숙한 박창진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이 쓴 <플라이 백(Fly Back)>이란 제목의 책이었다.

살며시 책을 펼친 서 검사는 "이 세상에 존엄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이 책의 에필로그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북받친 감정이 목소리를 자꾸 억눌렀다.
   
대한항공 '땅콩회항' 피해자 박창진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이 쓴 <플라이 백> 출판기념 낭송회가 열리고 있다.
 대한항공 "땅콩회항" 피해자 박창진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이 쓴 <플라이 백> 출판기념 낭송회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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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 셔츠를 입고, 반짝반짝 광이 나는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서면서 큰 보람을 느꼈던 적이 있다. 내가 이 항공사의 대표 승무원이라는 마음과 정성으로 노력을 쏟았고, 진정한 서비스맨이 되기 위해 청춘과 열정을 모두 바쳤다. 누구보다 보람찬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과 자존감을 함께 느꼈다. 그러나 2014년 12월,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날 뉴욕 JFK공항에서 나는 그녀에게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감까지 짓밟혔다. 하지만 나는 비행기 밖으로 쫓겨나는 순간까지도 가해자에게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 243쪽
 

서 검사가 참석한 이 날 행사는 14일 오후 8시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 JU동교동에서 진행된 <플라이 백> 출판기념회였다. '폭력의 시대, 그 기억을 낭송하다'라는 제목의 이날 출판기념회는 특이하게 박 지부장과 비슷한 길을 걸어온 이들이 자신이 직접 고른 책의 내용을 읽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감정을 추스르고 낭송을 이어가던 서 검사는 다시 울컥하고 말았다.

"종내에는 나의 존엄을 위한 투쟁이 누군가의 마음에 불씨를 일으켜 작은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비록 견고한 세상은 쉽사리 바뀌지 않겠지만 나와 같은 사람들의 외침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다 보면 분명 다른 사람들의 가슴 속에도 저마다의 존엄이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 하나하나의 존엄이 깨어날 때마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이 올 가능성이 커진다고 믿는다. 앞으로도 나는 내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것이다." - 245쪽

"대한항공의 또라이, 검찰의 미친년"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 강연장에서 열린 박창진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의 <플라이 백> 출판기념 낭송회에 참석한 서지현 검사.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 강연장에서 열린 박창진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의 <플라이 백> 출판기념 낭송회에 참석한 서지현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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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출간된 박 지부장의 <플라이 백>은 그가 대한항공에 입사해 이른바 '땅콩회항'을 겪고, 지난해 대한항공 사태 후 노조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책이다. 서 검사는 왜 <플라이 백>의 이 문구를 낭독하기로 마음먹었을까.

그는 "(박 지부장과 저는) 성별도, 직업도 다르고 전혀 다른 일을 겪었지만 이후 벌어진 일들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라며 "에필로그 부분이 너무 제 이야기 같고, 제가 쓴 글 같아 감정이입이 됐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 검사는 "박 지부장은 대한항공의 또라이, 저는 검찰의 미친년이었다"라며 "입을 열었다는 이유로 (박 지부장과 제가) 조직 내에서 당한 따돌림과 괴롭힘이 너무 유사했다, 지난해 6월 처음 박 지부장을 만났는데 지부장님이 이야기하면 제가 울고 제가 이야기하면 지부장님이 울었다"라고 덧붙였다.

이날 서 검사가 꺼낸 자신의 이야기는 정말 박 지부장의 삶과 닮아 있었다. 특히 그가 낭독한 "누구보다 보람찬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과 자존감을 함께 느꼈다, 그러나 2014년 12월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라는 부분이 그랬다.
 
"저는 2등 검찰이었어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남자 검사 못지않아'라는 말이 칭찬이었어요. 아등바등해도 항상 모욕적 언어, 성추행, 성희롱을 일상적으로 겪었어요. 싫은 내색을 보이면 '저런 애랑 일 어떻게 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누군가는 '그깟 엉덩이 정도 만진 것 같고'라고 그랬죠. 맞아요. 그깟 일, 어깨 쓰다듬고, 손잡고, 너무 많이 겪었어요.

근데 인사보복까지 했잖아요. 제가 15년 동안 젊음, 일생, 열정 등 모든 걸 바쳤는데 그걸 한순간에 부인한 거잖아요. 열심히 했고 여검사 최초로 특수부까지 갔는데, 일 못 해서 날아간 검사가 돼 있는 거예요. 견딜 수 없었어요. 정의를 실현하고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 검사가 된 건데 내 자신의 불의를 이야기하지 못하고, 내 피해조차 구제하지 못하면 검사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 나온 분들은 용기 있는 고발자이면서 생존자"
  
<플라이 백> 출판기념 낭송회에서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발언하고 있다.
 <플라이 백> 출판기념 낭송회에서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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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정의당 국회의원, 권수정 정의당 서울시의원, 김승하 철도노조 KTX승무지부장도 이날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박 사무장의 책을 낭송했다. 심 의원이 주목한 건 '의지'였다. 그는 "박 지부장을 비롯해 오늘 여기 나온 분들은 용기 있는 고발자이면서 생존자다, '당당하게 내가 설 수 있게 됐다'는 의지의 표현이 담긴 프롤로그를 읽게 됐다"라며 아래 문구를 고른 이유를 밝혔다.

"내가 겪은 일은 누구라도 언제든지 겪을 수 있는, 어쩌면 오늘도 우리 주위에서 누군가는 겪고 있을 일이다. 나의 경우 처음에는 당황하고 절망스러웠지만 그다음에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을 따름이다. 그러다 보니 유명해졌고, 뭔가 큰 교훈을 주려는 사람처럼 돼버렸지만 내가 그런 걸 의도하고 살아온 것은 아니며,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난 그저 밟혀서 부러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단지 사람들에게 이 모든 일이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고통스러운 과거와 마주할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 12쪽
  
대한항공 '땅콩회항' 피해자로 알려진 박창진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이 쓴 <플라이 백> 출판기념 낭송회
 대한항공 "땅콩회항" 피해자로 알려진 박창진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이 쓴 <플라이 백> 출판기념 낭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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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나항공 노조위원장 출신인 권수정 시의원은 '공감'을 토대로 낭송할 문구를 골랐다. 그는 "승무원 바지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여승무원회'에서조차 왕따를 당했고 사과 성명을 내란 이야기도 들었다"라며 "(회사가) 저와 가까운 동료들을 괴롭히면서 '네가 괴롭힘 당하는 건 권수정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이후 믿었던 친구들이 떠나가는 과정을 겪었던 입장에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단락을 읽었다"라고 설명했다.
 
"(후배와의) 전화를 끊고 난 뒤 L임원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 같았다. 그 후배는 염탐꾼이었음이 분명했다. (중략) 그러나 이런 사실을 더 부연하지는 않았다. 그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을지 짐작됐으니까. 그는 지금 잔혹한 현실을 실감하는 중이다. (중략)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 또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의 곁에 있어야 한다. 이 잔혹한 현실을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할 것이다. 그게 동료가 할 수 있는 일이다." - 228쪽


KTX 승무원으로 일하다 해고된 후 지난해 13년 만에 복직한 김승하 지부장은 '연대'를 키워드 삼았다. 그는 "박 지부장처럼 저희도 13년 동안 고난과 절망을 겪었지만 그래도 저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라며 "지금도 저를 '특채녀'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많지만,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이 힘차게 꿋꿋하게 지켜주고 있어 힘을 얻게 되는 것 같다"라고 강조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눈앞에 수많은 가이 포크스가 앉아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텅텅 비어 있던 공간이 눈을 감고 있던 그 짧은 시간에 사람들로 채워진 것이다. 믿기지 않았다. (중략) 그 뒤로도 울분 섞인 발언이 이어졌다. 두려움에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했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긴 세월 가슴 속에 쌓아온 감정을 토해냈고, 다른 사람들의 사연에 열렬히 반응했다.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대한항공의 주인이 회장 일가가 아닌 직원들이라는 점을 소리 높여 외쳤다." - 18쪽

'고통스러운 과거' 낭독한 박창진
  
대한항공 '땅콩회항' 피해자로 알려진 박창진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이 자신이 쓴 <플라이 백> 출판기념 낭송회에서 낭송하고 있다.
 대한항공 "땅콩회항" 피해자로 알려진 박창진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이 자신이 쓴 <플라이 백> 출판기념 낭송회에서 낭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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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박 지부장도 자신의 책 일부를 낭송했다. 그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다시 떠올려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낭송할 문구로 택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사회적으로 알려진 사람을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마구잡이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저도 가족이 있고 감정이 있으며 나약한 존재인데 그것은 배제되고 유명 사건의 '누구'로만 남아 있었다"라며 "이건 나만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이 될 수 있다, '스위치 오프'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나도 모르게 베란다 창문을 열고 그 앞에 섰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내 몸 세포 하나하나를 뚫고 들어왔다. 저 아래 지상이 아득해보였고, 그곳으로 가면 편히 쉴 수 있을 것만 같아 멍하니 내 맨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략) 큰 누님이 밤중에 거실에 나왔다가 난간에 서 있는 나를 보고 가슴이 덜컥해 그대로 달려 나온 듯했다. 누님은 엉엉 울며 말했다. (중략)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렇게 나약하게 문제를 회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바로 그다음 날 한동안 가지 못했던 헬스클럽을 찾아가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 125~126쪽
       
 
<플라이 백> 출판기념회에 모인 김승하 KTX승무지부장, 서지현 검사, 박창진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 권수정 서울시의원, 심상정 정의당 의원.(왼쪽부터)
 <플라이 백> 출판기념회에 모인 김승하 KTX승무지부장, 서지현 검사, 박창진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 권수정 서울시의원, 심상정 정의당 의원.(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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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사회를 맡은 변영주 영화감독은 "제 삶의 중요한 깃발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다섯 분을 모시고 행사를 진행하게 돼 너무 영광"이라며 "많은 분들이 <플라이 백>을 읽어주시면, 상처받고 힘든 우리의 친구가 어떤 생각으로 인간답게 살기로 결심했는지 널리 알려주시면 세상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플라이 백 - 갑질로 어긋난 삶의 궤도를 바로잡다

박창진 지음, 메디치미디어(2019)


태그:#박창진, #서지현, #심상정, #권수정, #김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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