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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천재 피아니스트,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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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가는 천재 피아니스트,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최원호의 '美美 하우스'] 드라마 <밀회>의 유아인이 읽은 그 책, <리흐테르>

테이블 위로 드러난 늙은 남자의 상반신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남자의 눈빛은 맑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볼이 움푹 패었고 입을 다문 채로 턱을 약간 벌리고 있다. 오래된 피로다. 당장 직면한 피로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발전기가 수명을 다한 것 같다. 그는 화면 밖에 있는 인터뷰어를 바라보며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게 다요." 남자는 고개를 숙인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질문을 던지려는 것처럼 인터뷰어를 바라본다. 그러나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다.

▲ 브뤼노 몽생종의 다큐멘터리 <에니그마>에 출연한 피아니스트 리흐테르. ⓒBruno Monsaingeon

화면은 현역 시절의 그가 연주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D.960의 2악장이다. 슈만이 '천상의 길이'라고 언급했던 길고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음악을 연주하는 영상 속의 그는 뭔가를 탐색하는 사람처럼 여기저기로 시선을 보낸다. 그 시선이 카메라와 거의 마주했을 때조차, 표정 없는 얼굴에서 시작된 눈빛은 늘 약간 아래를 향해 있다. 저렇게 배어나오기 시작한 슬픔이 이 남자를 장악했다. 다시 화면이 늙은 남자를 비추면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괴로워하고 있다.

이 장면은 브뤼노 몽생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에니그마>의 마지막 순간이다. 늙은 남자의 이름은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이며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누구보다도 많은 업적을 이루었던 피아니스트의 마지막이 이토록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기에 <에니그마>의 마지막 장면은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리흐테르는 이 영화 속에서 이러한 일종의 자기멸시가 단지 피아니스트로서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렇게 말할 때조차 어조에는 변화가 없다. 그는 모두 놓아버린 듯 보인다. 전직 피아니스트였으며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

▲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이세욱 옮김, 정원출판사 펴냄). ⓒ정원출판사
역시 브뤼노 몽생종이 편저자인 책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이세욱 옮김, 정원출판사 펴냄, 이하 '리흐테르')은 다큐멘터리 <에니그마>와 함께 작업되었다. 같은 인터뷰를 바탕으로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책과 영화는 많은 에피소드를 공유한다. 그러나 <리흐테르>를 읽으면서는 <에니그마>에서 마주하게 되는 파국을 감지하기가 어렵다. 총살당한 아버지에게 얽힌 기구한 가족사와 간헐적으로 겪은 우울증 및 육체적 노화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리흐테르> 속의 리흐테르는 영원한 청년의 기운을 풍긴다. 냉정하면서도 풍부한 감성을 자랑하는 낭만주의적인 천재의 초상이다.

요컨대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어떤 나라에 도착하면 나는 지도를 펼쳐 놓고 나에게 무언가를 연상시키거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소들을 흥행사들에게 가리킨다. 가능하다면 내가 아직 가 볼 기회를 갖지 못한 장소들을 말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떠난다. 피아노를 실은 차가 우리 뒤를 따른다. 우리는 마치 역병을 피하기라도 하듯 고속도로를 피해서 이동한다. 그러면서 나는 로안이나 몽뤼송이나 프로방스 지방의 한 귀퉁이에서 연주를 한다. 연주회장은 극장이 될 수도 있고, 예배당이나 교정이 될 수도 있다. (195~197쪽)

레닌그라드에서는 공습이 시작되고 난 뒤에야 라디오에서 그 사실을 알려주곤 했다. 그 날 저녁,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홀을 막 나서는 참에 폭탄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리엔 얼어붙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 이튿날 필하모니 홀에 가 보니, 창유리들은 산산조각이 나 있고 홀의 창문들은 활짝 열려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러시아 미술관에 포탄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연주회는 열렸다. 청중은 외투를 입은 채로 연주를 들었다. 그들은 대단히 감동한 듯했다. 나는 이 일을 괜찮았던 콘서트의 하나로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 이듬해 비슷한 시기에 나는 레닌그라드에 다시 갔다. 나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년 전에 본 그 도시의 모습이 오간 데 없기 때문이었다. 도시를 포위하고 있던 독일군은 물론 물러났다. 거리에는 인파가 넘쳐났고, 분위기는 환희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분위기가 역겹기 그지없었다. (…) 처음 갔을 때는 등화관제와 공습 때문에 사위가 어둠에 잠겼어도, 도시가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포탄도 떨어지고 있었고…. 그랬는데 모든 게 완전히 범상한 것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117~118쪽)

우울함과 슬픔은 엄연히 다르다. <리흐테르>는 슬픈 에피소드들조차 방랑의 한 여정으로 설정한다. 따라서 인터뷰 당시의 늙은 리흐테르라는 인간을 직시하고 만 <에니그마>에 비하면 <리흐테르> 속의 리흐테르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캐릭터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편저자 서문에서 브뤼노 몽생종이 밝혔듯 리흐테르의 회고들이 대부분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70년 이전에 대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1970년 이후부터 인터뷰가 이뤄진 1995년 사이의 '노화되어가는'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다. 그 기간을 대신 채우는 것은 각종 공연과 음반의 리뷰만으로 가득한 그의 음악노트 뿐이다. 만약 그 노트에도 삶의 흔적들을 채워 넣었다면 <리흐테르>는 한 인간의 보다 완성된 일생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리흐테르> 속 리흐테르의 삶은 애초부터 그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그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의도적인 누락은 어떤 증언보다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단지 몇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할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조차 발설할 수 없는 회한의 형식으로 인생 전체에 드리운 두려움과 불안이 그의 사랑의 총체였다고 한다면 그 사랑은 그의 삶에 있어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리흐테르가 게이였다는 것이 이제는 정설로 굳어가고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게이에 대한 범사회적인 압력만이 그를 침묵하도록 만들었을까. 리흐테르는 침묵한다. 침묵 속에서는 가정은 의미가 없고, 거기서 비로소 순수한 고통이 탄생한다.

그렇다면 그 침묵, 그 지워짐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남아있는 것들, 그가 남기고자 한 것들로부터 그려나가야 할 것이다. 1970년 이후의 삶. 오로지 음악만을 위한 메모들. 즉,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고통 이외 모든 것으로서의 음악. 또는 앞으로도 영속할 위대한 음악에 대한 단상들 바깥을 온통 장악한 소멸하는 육체의 흔적이다.

음악과 육체.

위대한 음악은 리흐테르에게 신성과도 같다. 악보 속의 음악은 악보를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이미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며, 연주자는 그 이상의 형태에 근접할 수 있도록 애쓸 뿐이다. 이콘과 신의 관계와 유사하다. 신성은 이콘-연주를 통해 체현되지만, 인간이 체현할 수 있는 신성이란 기껏 조각에 불과하다. 다만 그 작은 조각들조차 범속한 세계에는 늘 놀라움과 신비를 가져다준다. 따라서 지속적인 이콘의 제작, 신성의 체현을 위해 도그마는 준수되어야 한다. 리흐테르는 교조적인 신념을 가진 수도사처럼 음악을 대한다.

악보를 보는 것의 장점은 무엇보다 그런 연주가 더 정직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눈앞에 있으면 쓰인 대로 정확히 연주하게 마련이다. 연주자란 하나의 거울이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으로 음악을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작곡가가 써놓은 <모든> 지시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이 안 되니까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에 찬성할 수 없다. (233쪽)

무릇 연주자란 하나의 실행자다. 작곡가의 의지를 정확하게 실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작품 속에 이미 있는 것만 들려줄 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 재능이 있는 연주가는 작품의 참모습을 언뜻언뜻 보게 해 준다. 그 자체로 천재적인 작품의 진실이 그를 통해 반영되는 것이다. 그는 음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의 연주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만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단지 어느 때부턴가 내 연주가 한결 자유로워진 점은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생활의 속박과 일체의 군더더기, 본질에서 마음을 돌리게 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이다. 나는 스스로를 안에 가둠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245쪽)

▲ <에니그마> 속 리흐테르. ⓒBruno Monsaingeon

스스로를 가두어 얻는 자유. 이는 리흐테르가 자신에게 주어진 연주 환경을 일종의 과제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피아노를 고르지 않으며 음반의 녹음과 마스터링 과정에도 참여하지 않고 공연장의 추위와 더위를 비롯한 온갖 악재를 시련으로 치환해 낸다. 이 시련들은 일종의 시험이다. 오직 한 가지, 리흐테르 본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만큼은 예외였다.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상황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고난과는 다르다. 그것은 시련으로서의 부름이 아니라 그에 응답하지 못하는 부족한 자신을 의미한다. 그는 가능한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고자 했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대해서만큼은 엄혹한 기준을 적용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어느 순간부터 부름에 응답하지 못한다. 리흐테르는 세월이 안겨다주는 육신의 한계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신의 영원한 현재성의 괴리감으로 인해 절망한다. 그는 타협할 수가 없다. 젊은 육체의 기억이 선명하고 악보를 읽는 지성은 여전히 번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가락은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고 연습이나 리허설을 버텨낼 수 있는 체력은 급격히 줄어든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기억들이 조금씩 자리를 비우기 시작한다. 절대음감을 자랑하던 청력은 나이를 먹으면서 피치가 어긋난다. 실제로 리흐테르의 후기 음반들의 프로듀싱 과정에서는 리흐테르가 자신의 왜곡된 청력에 맞추어 잘못 조옮김한 연주를 다시 정상적인 음높이로 재조절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리흐테르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 평생을 음악에 바친 대가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230쪽)

영원히 지속되기를 갈망하는 정신. <리흐테르>에는 이와 관련된 간접적인 언급이 있다. 리흐테르는 우울증에 빠질 때면 환청을 들었는데, 1974년의 어느 날 가만히 그 환청에 정신을 집중한 결과 그 환청이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즈'를 주제로 한 일종의 변주곡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리흐테르는 이 곡에 대해 '내가 초기에 작곡한 몇몇 작품들의 무의식적인 모델'이었다고 말한다. 1974년, 침묵에 이르는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리흐테르의 무의식이 호출한 것은 '최초의 음악적 자의식' 또는 최초에 자의식을 형성했던 당시의 환경이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성장해 온 그의 정신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출발점에서 지녔던 육신이었다. 드높은 정신에게 드높은 육체를. 그것이 이른바 '조화'다. 그러나 상승하는 정신과 하강하는 육체의 그래프는 엇갈리도록 만들어져 있다. 두 그래프가 만나는 지점은 매우 짧았을 것이다. 그저 번뜩이는 한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영광의 순간은 짧고 점점 폭을 넓혀가는 마음과 몸의 불일치는 그의 후반생을 잠식해 들어간다.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음악을 신의 역할에 두었을 때의 문제는, 음악은 구원도 내세도 약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성은 태양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연주자는 늙어 버려지고 만다. 신이 아닌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신앙으로부터 버려진다. 죽음은 마지막으로 받아들여야 할 과제이지만, 아무런 보상도 구원도 없이 모든 과업을 멈추게 하는 최종 과업은 과연 어떤 종류의 부름일까. 지속적인 파멸 이외에 어떤 선한 것을 찾을 수 있을까. 리흐테르는 침묵한다.

사실은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육체의 쇠락에 발맞추어 정신까지 서서히 꺼뜨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평화를 보장하는 방법은 광기뿐일지도 모른다. 에너지를 유지한 채로도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

(쇼스타코비치가) 천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에게도 광기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에게도"라고 말했을까?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나는 광인이 아니다.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어쩌면 나는 광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늘 그런 식이다…. (214쪽)

그러나 어떤 후회도 돌이킬 수는 없다. 다른 인간이 될 수도 없다. 늙어 은퇴한 피아니스트에게 다른 기회란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리흐테르>는 슬픔조차 인생의 여정으로 받아들인 초인의 여정이 아니라 어느 순간 죽어가는 육신 속에서도 여전히 선명한 기억들로 인해 고통 받는 한 인간의 기록으로 변화한다. 가공할 만한 기억력으로 인해 지나온 삶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모두 바라보면서 삶의 뒤켠으로 물러서야만 하는 사람. 그때 삶이란 별들처럼 영영 그 자리에서 빛나는 기억들일까 아니면 어둠을 향해 뒷걸음질 치는 발걸음일까. 책의 2부인 음악노트는 200페이지가 넘도록 음악을 찬미하는 동시에 삶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그 질문에 나름의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다.

이 책은 겨우,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프로코피예프의 생일 때였다. (…)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나는 그 날의 일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나에게는 매우 특기할 만하고 흥미로운 날이었음에도 말이다. (…) 모든 일이 마치 현실과 동떨어진 채 나와는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프로코피예프가 언젠가는 무대에 올릴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던 「전쟁과 평화」와 「들꽃의 전설」에 관한 대화는 기억이 난다. 또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때가 초봄이었다는 것이며 니콜리나 고라로 통하는 길, 당시엔 다리가 없어서 나룻배로 모스크바 강을 건넜던 일, 정원으로 나를 맞으러 나왔던 프로코피예프의 모습, 감미롭고 삽상한 공기를 느끼며 처음으로 베란다에서 가져 본 격조 높은 점심 식사, 봄의 냄새들…. (156~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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