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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차별, 책 차별, 독자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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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차별, 책 차별, 독자 차별

[프레시안 books] 로라 J. 밀러의 <서점 vs 서점>

여기 한 권의 신간이 있다. 이 책이 우리나라 평균 발행 부수인 2000부를 발행했다고 치자. 초판(1쇄) 발행 부수가 모두 팔리고 재판(증쇄, 2쇄)을 찍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짐작되는 것처럼 그 비율은 높지 않다. 그나마 이름 있는 저자나 눈에 띄는 효용성이 담보된 책이 아니라면, 초판이 1년 이내에 모두 판매될 확률은 상당히 낮다.

신간 판매를 위해서는 거창한 광고나 판촉 마케팅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형 서점에서 어느 정도 눈에 띄는 자리에 책을 진열하거나 인터넷서점의 배너에 책 광고라도 띄우는 노력이 요구된다. 우리나라 대형 서점 몇 곳의 목 좋은 자리마다 표지가 보이도록 책을 진열하는 데만도 최소 몇 백만 원이 소요된다. 예전 같으면 서점이 알아서 좋은 책을 선별해 독자에게 선보이던 방식이 자릿세 받고 임대해주는 광고용 매대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힘없고 다른 홍보 방법을 찾기 어려운 출판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대형 서점의 요구에 따르기 십상이다.

이는 출판유통 현장에서 갑과 을의 관계를 보여주는 작은 단면이다. 서점에 판촉비 명목으로 지불하는 그 몇 백만 원이 저자나 번역자에게, 또는 출판사 직원의 근무조건 개선이나 책의 제작에 쓰인다면, 훨씬 양질의 책이 나올 것이라는 부질없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프레시안(안은별)

지난 2월에는 국회에 상정되어 1년 넘게 방치된 도서정가제 관련법(출판문화산업진흥법) 개정안 관련 민간 협상에서 총액 기준 15% 할인까지 허용하자는 온․오프라인서점 간의 합의안이 도출되었다. 정책적 판단 기준이나 소신조차 없이 민간 업계에 단일 합의안만을 요구하는 무기력한 국회나 정부의 분별력 없는 행태도 문제지만, 온․오프라인 서점계에 할인율 협상의 공을 넘겨버린 출판단체들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출판단체들은 어느 유통 방식이나 유통 경로이든 매출만 유지되면 도서정가제야 어찌 되어도 좋다는 초연함, 당사자간 협상 과정에서 핵심 당사자(출판사)가 빠짐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유통 권력자인 온라인서점을 간접적으로 두둔하는 배려심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세계 각국의 도서정가제 역사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도서정가제를 포함한 유통제도의 모양새가 달라지는 결정적 변수는 다름 아닌 '출판계의 의지'라는 진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국회부터 관련업계에 이르기까지 책임지고 총대 메는 사람 하나 없이, 온․오프라인 서점의 절충에 기대 출판시장의 유통질서를 정하는 한심한 한국 출판의 자화상이다.

미국 현대 서점 역사의 생생한 다큐멘터리

▲ <서점 vs 서점>(로라 J. 밀러 지음, 박윤규·이상훈 옮김, 한울 펴냄). ⓒ한울
미국 사회학자 로라 J. 밀러(브랜다이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쓴 <서점 vs 서점>(원제: Reluctant Capitalists, 박윤규·이상훈 옮김, 한울 펴냄)은 지난 한 세기 동안의 미국 서점 역사를 다룬다. 수없이 많은 서점인과 도매상, 출판인, 독자(소비자)와의 인터뷰, 그리고 관련 문헌을 샅샅이 뒤져 요령 있게 정리한 노작이다. 책에서 말하는 '서점 대 서점'의 한쪽은 체인서점이고, 다른 한쪽은 독립서점이다. 말하자면 체인서점과 독립서점의 화해하기 어려운 갈등과 대결의 역동적인 드라마를 통해 미국 출판유통의 변천사를 그려냈다.

전국 단위의 체인망을 갖춘 기업형 대형서점과 개인이 운영하는 소형서점은 태생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동일한 상권과 출판시장을 두고 벌이는 싸움에는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마련이다. 체인서점은 자본력에 기반한 효율성과 매장 대형화, 안락하고 캐주얼한 분위기 연출, 표준화, 매출 지상주의를 무기로 독자층과 출판시장의 저변을 넓힌 공적이 있지만, 규모의 경제와 이윤 추구에만 치중한 나머지 기존 시장질서의 파괴자가 되는 양면성을 갖는다. 심지어 체인서점의 구미에 맞지 않는 책들은 출판사들이 출판 자체를 꺼리게 만들고, 발행 부수 결정을 좌우하는 등 '유통권력의 검열'이 공공연히 이루어질 정도이다.

적어도 1960년대까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던 미국 독립서점들은 30년 뒤에 그 자리를 체인서점에 내주게 된다. 책은 체인서점과 독립서점의 경쟁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인터넷서점, 유통사(도매상), 독자 등의 다양한 입장과 각도에서 문제적 현실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체인서점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지만 독립서점들에 대한 쓴소리까지 객관화시켜 가감 없이 개진한다. 책이라는 상품은 일반 소비재와 다르다는 신앙적 열정에 사로잡힌 관련 업계 종사자들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주지만, 동시에 냉철한 학문적 거리감을 거두지는 않는다.

책 구입도 정치다

출판사로부터 돈을 받고 체인서점이 중요한 매대를 내주는 것에 대해 미국 독립서점 관계자나 비판론자들은 '정교한 사기' 또는 '매수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동일한 현상에 대해 한국에서는 이를 논란거리로 삼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대형서점의 상업주의에 매수되었거나, 아니면 고칠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해버린 것일까?

저자가 미국 서점 역사를 정리하면서 독자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소비는 정치"라는 사실이다. 물론 소비는 소비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일이지만, 그러한 선택들이 모여 자본주의 시장질서의 어떤 흐름을 만들거나 없애고 문화시장의 지형도를 바꾸기도 한다. 독자가 어디에서 책을 사는가 역시 단순한 소비 행위로 그치지 않고 출판시장, 지역문화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의사 표현이라는 함의이다. 아무 문제도 없고 공정할 것 같은 출판시장에서 소비자가 눈앞의 할인에만 매달리는 사이, 소비자 자신과 후세의 책 구매 환경은 복원하기 어려운 역경에 처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서점의 운명이 곧 미래 독자의 운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점의 단결, 그리고 '고객을 끄는 매력'이 자생력의 관건

책을 읽다보면 한국과 흡사한 점이 적지 않은 미국의 출판시장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서점 규모와는 무관한 서점원들의 열악한 저임금 구조, 체인서점 진출 지역에서의 벌어지는 독립서점들의 궐기대회, 유통시장의 패권을 쥔 체인서점이나 인터넷서점에만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대형 출판사들의 행태가 특히 그렇다. 영향력 있는 출판사들은 큰 폭의 유통 마진으로 할인의 동력을 마련해주는 낮은 공급률과 판매 장려금, 반품, 파손본의 무상 처리 등 모든 측면에서 대형서점에 유리한 특혜를 준다. 소형서점에는 제공되지 않는 것들이다. 미국 서점들은 이에 항거하여 출판사를 불공정 혐의로 제소하고 승소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서점 차별이 보다 극단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곳이 한국이다. 4대 인터넷서점에서만 벌이는 각종 마케팅 이벤트, 서점에서는 시도조차 해보기 어려운 홈쇼핑 단독의 대폭 할인 판매, 대형 화제작의 공급량 미비 등이 대표적이다. 소형서점에 대한 명백한 유통 차별이다.

할인율은 또 어떤가. 책은 "1998년까지 미국에서 출간된 모든 책의 36%는 할인된 가격으로 팔렸다"고 증언한다(216쪽). 반면 우리나라는 도서정가제 국가라 칭하면서도 정가로 판매되는 책은 단 1%도 찾기 어려운 현실이다. 1900년 무렵 출범한 미국출판협회와 미국서점협회도 그 결성 계기가 정가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미국서점협회가 대형 출판사나 체인서점을 상대로 벌인 소송 사건들의 역사는 '미국은 원래부터 정가제가 없는 나라'라는 편견을 불식시킨다.

▲ 대형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아이들. (이 사진은 특정 내용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연합뉴스

<서점 vs 서점>에는 한국 서점계가 주목할 만한 사례들이 풍부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독립서점들이 중심이 되어 벌인 '북센스' 캠페인 같은 판매촉진 사업은 시사적이다. 1999년부터 미국서점협회가 중심이 되어 벌인 '북센스'는 통일된 로고, 포스터, 상품권 제도 같은 기본 사업을 필두로 ▲ 전국 중소서점들이 집계하는 '북센스 베스트셀러' 목록 발표, ▲ 참여 서점들의 추천서인 '북센스 76' 목록(2004년부터 '북센스의 선택'으로 바꾸고 목록은 40종으로 조정), ▲ 전자상거래를 지원하는 '북센스닷컴' 사이트 운영, ▲ 크로스 머천다이징의 전개(이를테면 코카콜라와 제휴하여 특정 음료수 구매 영수증을 보여주면 가맹 서점이 4달러의 할인권 제공), ▲ <뉴욕 타임스>나 공영 라디오 등 유력 언론을 통한 홍보, ▲ 기존의 '미국서점 올해의 책'을 바꾼 '북센스 올해의 책' 발표처럼 지역 중소서점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다양한 활동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또한 미국 중소서점들이 1973년에 독립서점조합을 설립해 출판사 협상력을 높이는 공동주문에 나서거나, 시민 참여형 독립서점 지원운동(이를테면 시민토론회, 한 달에 한 권씩 구입하겠다는 서약 등)을 이끌어내는 역동성도 우리에게는 신선한 것들이다.

한국 서점계(특히 중소서점들)는 대형서점이나 인터넷서점보다 훨씬 높은 출판사의 중소서점 공급률을 낮추려는 공동주문 체계 운영 등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각종 협동화 사업의 전개, 고객이 다시 찾고 싶은 문화적 거점을 만드는 매력적인 서점상의 구현 등 산적한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출판시장이 급변하고 독자의 구매력이 감소하는 환경에 맞서 '따로 또 같이' 압도적인 자구노력을 경주했으면 한다. 그 길이 비록 어렵지만 가장 강력한 대안이라는 것을 선진국 서점계 사례에서, 또 <서점 vs 서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책을 좋아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은 독자들은 여전히 많다. 서점의 운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나아가, 대한민국 건국 이래 한 번도 만들어진 적이 없는 '서점 육성 종합계획' 등의 정책 지원방안도 강구되어야 한다. 서점은 책과 출판 생태계의 젖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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