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자본과 문명의 그늘에 사는 우리 이웃들, 빛 볼 날 있을까

정원식 기자

▲ 무당벌레는 꼭대기에서 난다…박찬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316쪽 | 1만2000원

2006년 60세에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박찬순씨(67)가 두 번째 소설집 <무당벌레는 꼭대기에서 난다>를 펴냈다. 표제작을 포함해 작가가 2010년부터 2013년까지 국내 문예지에 발표한 9편의 단편이 실렸다. 작가는 이 소설집의 출간이 2011년 아이오와 국제창작프로그램(IWP)에서 얻은 경험에 크게 기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들 모두 남루한 생의 덤불 속에 숨어 있는 눈부신 조각을 찾아내고 그 너머 깊고 먼 어떤 곳에 도달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간직한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그들에게서 옮아온 그 그리움의 힘으로 쓸 수 있었다. 살며, 사랑하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승리하는 내 이웃들의 이야기.”(‘작가의 말’)

[책과 삶]자본과 문명의 그늘에 사는 우리 이웃들, 빛 볼 날 있을까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그 이웃은 자본과 문명의 그늘에 살고 있는 이들이다. 표제작 ‘무당벌레는 꼭대기에서 난다’의 주인공 ‘용이’는 고층빌딩 청소부로 일한다. 그가 150m 상공에서 로프와 비계에 의지해 빌딩을 청소하는 이 위험한 직업에 뛰어들기로 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용이는 취업을 위해 여러 학원을 오가며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컴퓨터 활용능력자격증, 인터넷 정보검색사, 물류관리사, 사무자동화, 다문화가정 상담사, 일본어, 토익 한자…스펙은 늘어가지만 취업문은 점점 좁혀진다. 용이는 어머니가 빌딩 계단을 청소하다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출구 없는 스펙 경쟁에서 이탈하기로 결심한다. 그러고는 찾은 곳이 어머니가 일하던 빌딩의 외벽 청소를 맡은 용역업체다. 용역업체 선배인 ‘건이 형’과 ‘창이 형’도 주인공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건이 형의 푸념이 이들의 삶을 압축한다. “마, 니나 내나 인생은 어차피 외줄 타는 기라.”

용이의 가장 행복한 추억이 머물러 있던 유년의 기억에서 무당벌레는 특별한 지위를 차지한다. 어린 용이가 무당벌레를 잡았을 때 할머니는 탄성을 내질렀다. “어쩜 이리도 탱글탱글할까. 내 새끼 용이처럼 앙증맞네.” 그 무당벌레는 현실에서 패하고 도시의 공중을 떠돈다. “나무 밑동에서부터 올라가면서 진딧물을 깨끗이 먹어치운 다음 꼭대기에 오른 뒤에야 녀석은 다른 나무로 날아갔다. 일하는 순서가 우리 로프공과는 역순이긴 하지만 꼭대기에서 나는 것은 똑같다.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눈에 생생하다. 빨간 바탕에 검은 점박이 무늬가 새겨진 둥근 날개 딱지를 활짝 펴고 자랑스럽게 포르르 날아가던 모습.”

용이는 꼭대기에 오른 다음에야 날개를 펼치는 무당벌레처럼 마침내 비상할 수 있을까. 이제 막 신입 로프공 생활을 시작한 용이는 소설 말미에 처음으로 초고층 빌딩 외벽 청소에 투입된다. “대저울 접시 위에 놓인 내 목숨 값이 파리 무게와 균형이 맞아떨어지는 그림이 그려진다. 자지러질 듯 아찔한 느낌. 나는 입을 옥다문 채 허공에다 경쟁력 있는 발길을 내질렀다.”

사진 | 문학과지성사 제공

사진 | 문학과지성사 제공

‘루소와의 산책’은 주인공이 자신의 아버지가 소유한 업체에서 일하다 수감된 스리랑카 출신 10대 이주노동자 루소를 면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루소는 같은 나라 출신으로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친구 꾸마라를 살해한 혐의로 수감됐다. 1인칭 시점의 이 소설에서 화자는 루소의 살인 동기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 배경에 한국 사회의 타락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암시한다. 돈 많고 오지랖 넓은 주인공의 어머니는 노래 실력이 탁월한 꾸마라를 오디션 프로그램에 내보내 돈을 번다. 현실의 이주노동자는 저임금 노동을 위한 소모품이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노래 잘하는 10대 이주노동자는 경쟁력 있는 상품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살인의 동기는 밝혀지지 않지만 그 결과는 자명하다. “어쩌다 욱해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꾸마라에게는 아무 유감도 없다고. 그저 아무 격의 없이 토닥거리며 함께 일하고 뛰놀던 스리랑카 차 밭 시절이 그리울 뿐이라고. 하지만 그는 다시는 그 차 밭으로 돌아갈 수 없다.”

소설의 무대가 국제적이라는 점은 이 소설집의 또 다른 특징이다. ‘나폴레옹의 삼각형’은 일본의 유키즈리(나뭇가지에 줄을 묶어 받쳐놓아 폭설 때 눈의 무게를 견디도록 하는 작업)를 소재로 일본 센다이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책 만드는 여자’의 무대는 미국 아이오와의 옥수수밭이다. ‘살사를 추는 밤’은 쿠바 아바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라고둥 공화국’은 미국 플로리다주 키웨스트를 배경으로 현대적 삶의 공허함을 드러내는 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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