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도 사람도 아픈 이곳… 그래도 꽃은 피어날까

박상률 | 작가

▲ 순비기꽃 언덕에서(서순희 | 문학과지성사)

서른 해쯤 전, 어떤 가수가 부른 ‘못 다 핀 꽃 한 송이 피우리라’는 가사가 들어 있는 노래가 있었다. 여느 대중가요와 마찬가지로 이 노래도 사랑의 아쉬움을 노래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노래가 떠오른 건 어인 일일까? 좋은 시가 그렇듯이 가사도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면 좋은 노랫말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체 부자유. 국토의 유린과 훼손. 작가는 둘 다 장애로 여겼다. 어린 시절 작가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 하지만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죄다 꿰고 있었다. 작가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 모두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대로 행동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점을 세세히 기억했다. 돌아다니지 못하기에 되레 온갖 마을의 ‘정보’가 더 집중되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 잘 되새길 수 있었는지 모른다. 성한 사람은 성치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면서도 자신들의 말을 성치 못한 사람에게 쏟아냄으로써 스스로 존재했다(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오히려 성치 못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어른도 읽는 청소년책]땅도 사람도 아픈 이곳… 그래도 꽃은 피어날까

작가의 고향 바닷가 마을에서는 근대화니 개발이니 하는 미명 아래 사람들이 터전을 잃고 좌절한다. 그 북새통 속에서도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도 있다. 그들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그들을 나무라지 않는다. 바닷가에서 싹을 틔워 모진 비바람을 다 맞으면서도 끝내 꽃을 피우고 마는 순비기꽃! 작가는 자기 자신은 물론 마을 사람들 모두 순비기꽃이라 여겼다.

순비기꽃은 아주 낮은 자세를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 모두 순비기꽃처럼 낮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작가의 분신인 ‘봉희’는 더욱 낮은 자세로 앉아 있다. 그는 앉아 있지만 세상 돌아가는 웬만한 이치는 다 안다. 그래서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손을 놀려 수를 놓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라는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터전을 뭉갠다. 그 개발에 덩달아 춤을 추는 사람도 있고, 터전을 잃는 걸 죽음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터전을 잃는 걸 자기 존재가 없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데도 나라는 얼마 안되는 추종자를 터전의 전체 대표자로 본다. 21세기에 제주 강정과 서울 용산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아도 알 수 있다. 20세기 때 나라에서 써먹은 방법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순비기꽃 언덕에서>는 세기가 바뀌어도 다르지 않은 나라의 행태를 보여준다. 근대화의 명목으로, 마을이 잘살게 된다는 개발 명목으로 사람들이 두 패로 나뉘는 걸 안타까워한 봉희는 “땅이나 사람이나 모두 아프다”고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는다.

훼손된 땅, 그것도 장애다. 몸 움직임이 성치 않은 소녀, 성한 몸이지만 개발의 삽날이 마구 들어와 박혀 상처투성이가 되고 만 땅. 봉희에겐 둘 다 다르지 않은 장애다. 봉희는 장애를 떨쳐냈다. 땅도 장애를 떨쳐낼 수 있을까? 그리하여 못 다 핀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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