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정국이 진행 되는 와중에 헌법재판소는 지난 8월 23일 인터넷 실명제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익명성을 악용한 불법정보나 인신공격 등 불건전한 인터넷 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도입된 인터넷 실명제가 시행 5년 만에 폐지됐다. 헌재의 인터넷 실명제 위헌 선고 근거는 “익명표현의 자유”다. 익명표현의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약자가 정치적 보복이나 차별의 두려움 없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정치적 비판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익명 사용을 관용한데 기인한다. 익명표현의 자유를 설명할 때는 미국 수정 헌법 제1조가 인용된다. 자유로운 표현은 절대적 권리라는 것이 미국 수정 헌법 제1조다. 이에 따라 익명의 표현도 절대적 권리에 해당 한다.

표현의 자유는 정치적 의사결정의 주체인 자유의지를 전제로 한다. 미국 수정 헌법 제1조가 표현의 자유를 채택한 것은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다. 권력이 있거나 없거나, 재력이 있거나 없거나 관계없이 미국 시민 누구나 평등하게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 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 하자는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마치 공기와 같아서, 민주주의가 활발하게 숨 쉬며 작동하게 한다. 따라서 민주제도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표현의 자유를 좀 더 넓게 해석한 이번 헌재의 결정은 시시비비의 대상으로 삼기 이전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충분한 명분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재의 인터넷 실명제 위헌 판결이 현실적으로 가져올지 모를 부작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는 나라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표현의 자유 역시 미국에서와 같이 한국에서도 사이버 공간에서 똑 같이 존중 돼야한다. 그런데 미국 민주주의의 성숙도와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도가 동일하다면 아무 문제없다. 유감스럽게도 미국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의지의 표현이 책임을 수반한 권리행사로 인식하는 성숙한 개인주의 문화에 기반하고 있음과 달리, 한국 민주주의는 집단적 관계와 패거리에 소속해야만 안도하는 감성적이며 몰개성적 개인주의, 즉, 성숙하지 못한 개인주의 문화에 머물러 있다.

헌법재판소는 인터넷 실명제 시행중,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과잉규제를 범 했고, 불법게시물이 줄지 않았을 뿐더러 개인정보도 줄줄이 유출 됐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헌법재판소는 인터넷상에 넘쳐나는 명예훼손, 욕설, 비방을 막고 건전한 인터넷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5년 전 인터넷 실명제 도입 취지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정의의 판결이 고질적 패거리 정치에 악용 돼선 안 된다. 당리당략에 눈멀어 헌재 판결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며 기고만장하는 정치권의 어릿광대짓은 꼴불견이다. 정치권이 헌재 판결이후 우려되는 악성 인터넷 익명문화의 근절 방책을 논의하는, 진정 국민을 위한 정치를 보여 줄 수 있으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사이버공간의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 개인 프라이버시의 침해, 특정인에 대한 집단 괴롭힘, 벌 떼 같이 달려드는 비열한 욕설 테러 등, 익명의 그늘 뒤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불법과 악행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인권이 훼손 되었고 상처를 입었으며, 여러 사람들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세상과 하직했음을 우리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제 대선 정국이 과열 되면서, 인터넷 익명 표현의 자유가 정치적으로 악용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소리 없이 국민들 간에 퍼져 나가고 있다.

정직, 책임, 배려, 인간존중과 같은 합리주의 가치는 인터넷 익명 표현 자유의 전제다. 집단주의 감성에 따라 합리주의가 휘둘리는 한국적 문화정서를 경계해야한다. 헌재의 인터넷 익명 표현의 자유 판결이 실효를 거두려면, 자유의지가 박약하고, 정직하지 않고, 책임의식 없으며,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없는 쓰레기 인간들을 국민의 명령으로 사이버 공간에서 추방해야 한다. 대선 정국의 선관위는 선관위대로 인터넷문화 정화에 동참해야한다. 인터넷 업체들은 온갖 지저분한 배설과 음모의 악취 진동하는 정치공간으로 이용됨을 거부하고 건강한 인터넷문화 정착에 앞장서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당장 이기고 보자는 거짓투성이 당리당략과 유치한 선거 전략의 도구로 인터넷 익명표현의 자유를 악용하지 않겠다는 정치권의 철석같은 다짐을 국민에게 약속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인터넷 익명표현의 자유가 한국 정치 성숙의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

전 문화관광부 차관보

객원 논설위원 이 진 배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