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창의

관동대 경영대 교수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그리스 시대부터 ‘국민의 지배’를 의미한다. 그러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변함없고 이의가 없다. 문제는 방법에 있다. 선거와 투표라는 방법이 선택의 폭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인식과 방법의 불일치를 야기하는 선택의 패러독스, 이것이 민주주의를 녹슬게 만들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객관식 도덕문제를 받아보는 초등학생 심정이 이해가 간다. 분명 맞는 것을 선택하여야 하는데, 틀린 것을 골라서 버리는 방법을 취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주어진 선택지 중에는 맞는 게 하나도 없으니, 가장 덜 틀린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고민이 생긴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없는 경우에, 문제오류에도 불구하고 정답처리를 위해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선택할 만한 것을 억지로 고르는 일도 생긴다. 분위기에 휩쓸리기 싫으면 백지를 내든가 시험에 참가하지 않는 방법이 있지만 이 또한 사회적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선택하고 싶은 사람이 없는 데, 정당정치의 공천이라는 미명 아래, 선택을 강요하는 게 요즘 선거의 모습이다. 공천의 힘이 한 곳에 집중될수록, 주류 쪽에선 돈 봉투가 난무하고 줄 대기가 성행하며, 비주류 쪽에선 몸싸움하고 이마에 핏대를 세우거나 극도의 냉소로 구성된다. 이런 선거 풍경은 사실 일반 사람들에겐 별세계 얘기다. 선거에 집중하고 관심가지는 극히 일부 사람들의 푸닥거리일 뿐이다. 그들만의 잔치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치다 못해 무관심하기까지 하다.

자기 자신의 판단에 의해 선택을 해야 하는데 남의 선택에 의해 좌우받는 세상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내가 찍은 사람이 꼭 1등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기의 선호도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누가 1등이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갖고 내가 던진 표가 사표(死票)가 되지 않도록 애쓰고 있는 형국이다. 여론조사라는 것이 개인의 주관성을 오염시킨다.

어찌어찌 선출되면 객관식 문제의 정답이나 되는 듯이 정치인들은 대뜸 국민을 지배하려든다. 그러나 잘못된 방법론과 문제오류에 의해 발생한 오답이 바로 자신임을 당선자가 겸허히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하는 데말이다. 진짜 선출되어야 할 사람들은 나서질 않았기에 내가 될 수 있었음을 알아채고 국민의 지배를 받는 공복(公僕)이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실제로 출마하는 사람들은 염치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망신살이 있어 도저히 어지간한 심장이 아니면 나서지 못할 사람도 얼굴 두껍게 나오고 선출되는 경우까지도 있다. 그렇다 보니 국민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어쩌면 흠이 많은 사람을 일부러 뽑아 놓은 양, 손가락질 하며 임기 중 내내 비난하고 흉만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국민들도 있다.

정당이름이 하도 많이 바뀌어 이름 외기도 어렵다. 우리네 정치인들도 정당을 여러 번 옮겨 다닌다. 선진국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그들은 늘상 국민의 뜻을 제대로 담기 위해서 정당을 새로 세우고 당적도 바꾼다고는 하지만 납득하기가 힘들다. 어쩌면 정당이 민주주의 패러독스의 본산일 수 있다. 일당 독재체제로 운영되는 미개국의 형태에서 양당체제로 운영되는 선진국 형태로 진행하는 것을 민주주의 발전이라 일컫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의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것은 경제학 측면에서는 어불성설이다. 고작 ‘독점시장’에서 ‘과점시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앞으로의 세상은 ‘소품종 다양화’시대로 바뀌어야 한다. 공천비리가 없어지지 않는 한, 거대정당정치가 사라져야 나라가 산다. 혹은 무소속이 대안일 수도 있다. 무소속을 선택한 유권자 심중에는 정당이 내놓은 선택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기타 답안’을 선택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선택을 해 준 유권자를 배반하고 무소속 당선자가 다시 정당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도 아이러니다. 어떤 이는 출마 때부터 무소속으로 뽑아주면, 정당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공약으로 내세우는 개그도 하고 있다. 역설을 멀리하고 진리에 가까워지려면, ‘주관’이 모여 ‘객관’이 되고 ‘미시(微視)’가 합쳐져서 ‘거시(巨視)’가 되는 깨끗한 민주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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