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의 작가가 서투름 속에 쓴 고민하는 진동 느껴져”

백승찬 기자

CBS 라디오 프로듀서 정혜윤

정혜윤(43)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전 어느 날, 알베르 카뮈의 <안과 겉>을 읽었다. 카뮈의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의 글도 함께 읽은 때였던 것 같다. 이 책에는 그르니에가 가난한 카뮈의 집을 찾아 헤매는 부분이 나오고, 카뮈는 그런 스승에게 22세에 쓴 자신의 처녀작 <안과 겉>을 헌정했다.

물론 정혜윤은 이른바 ‘세계문학전집’에 속하는 <페스트> <이방인>을 읽었고, <전락>이나 <최초의 인간>도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자꾸만 <안과 겉>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삶의 정수를 얻어낸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그러나 각자에게는 저마다인 죽음. 하여간, 그렇기는 해도 역시 태양은 우리의 뼈를 따뜻하게 데워준다.”

[애서가의 책꽂이]“22살의 작가가 서투름 속에 쓴 고민하는 진동 느껴져”

역자 김화영은 <안과 겉>이 “서투르고 불분명한 구석이 많다”고 이른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가 때로는 우리에게 유별난 감동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고 재빨리 덧붙인다. “그 서투름 속에서 번민하는 젊음의 진동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채 우리의 영혼 속으로 직접 전달되기 때문”이다.

기실 <안과 겉>에서 카뮈는 ‘애늙은이’ 정서를 보여준다. 식민지 알제리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20대 초반의 프랑스 청년은 5편의 길지 않은 에세이에서 줄곧 죽음과 늙음을 관찰한다.

오른쪽 반신이 마비된 채 방치돼 고독에 빠진 이, 적당히 물려받은 유산으로 지하 묘지를 산 뒤 매주 일요일마다 자신이 묻힐 그곳을 찾는 이를 그린다. 그 속에서 세계의 이쪽과 저쪽을 한 장면에 담는다.

카뮈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싶지도 않고 또 남이 선택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 큰 용기란 빛을 향하여서도 죽음을 향하여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하는 일”이라고 쓴다.

정혜윤은 그런 카뮈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카뮈보다 한 살 어린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인용했다. “16살, 이미 늙어 있었다.” 우리는 여러 개의 삶을 동시에 산다. 회사의 구성원,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애인. 정혜윤은 “인간은 누구도 어리거나 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의 청춘은 우리가 한 일들 속에서 다시 돌아올 뿐이다.

“요즘은 ‘미래의 관점’을 갖기 위해 굉장히 노력하고 있어요. 지금 제가 말하는 이 순간을 미래에서 돌아보면 어떨지. 그 순간의 강도, 우선 순위에 변화가 있겠죠. 다들 미래가 불안하다고 해요. 그럼 우리 거기(미래)에 가 있다고 쳐요.”

[애서가의 책꽂이]“22살의 작가가 서투름 속에 쓴 고민하는 진동 느껴져”

카뮈는 가난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 오히려 카뮈는 아무것도 간직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재물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사라져버리고 마는 자유가 내게는 아까운 것”이라고 말했다. 시대를 비관하되, 개인을 낙관하기. 그러므로 “세계는 비참하지만 내게는 태양이 있었다”는 말은 정혜윤이 꼽은 <안과 겉>의 핵심이 된다.

정혜윤은 인간을 “중간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비참과 아름다움, 모욕과 자긍심. <최초의 인간> 속 가난한 소년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가로등 밑에서 읽듯, 우리는 우리에게 비춰진 작은 불빛을 통해 정신의 헐벗음을 벗어날 수 있다고 정혜윤은 믿는다.

최근 저서의 제목처럼, 정혜윤은 ‘삶을 바꾸는 책 읽기’를 지향한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언제 책을 읽나요?’ ‘책이 정말 위로가 될까요?’ ‘책이 쓸모가 있나요?’ 등의 질문에 정혜윤은 조곤조곤 답한다. 물론 모든 책이 삶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정혜윤은 “도움 되는 사람만 만나냐”고 되묻는다. 이를테면 책을 펴기 직전의 사람은 수인이다. 수인은 감옥 바깥의 세상이 감옥 안쪽의 세상보다 조금은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출감이나 탈옥을 꿈꿀 이유가 없다. 정혜윤에게 책은 ‘감옥 바깥’이다. 물론 어떤 이에겐 유기견, 나무 한 그루, 지렁이가 ‘감옥 바깥’일 수도 있다. 꿈을 꾸게 해준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카뮈는 통상 개인의 내밀한 고독, 결단을 이야기한 ‘실존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카뮈는 사회 참여의 시선을 거둔 적도 없다. 그에게 고독은 ‘사회가 갈라놓은 사람들을 다시 결합시켜 주는 것’이었다. 정혜윤 역시 ‘자기 위로’로써의 책 읽기를 경계한다. “사회에 현란하게 적응하지 못한 자들이 쓸쓸한 밤에 책 읽는 모습은 흔하다. 그러나 책 읽는 힘으로 무언가 바꿔보고자 한다면 그와는 다른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수백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의 독자들이 있다고 치자. 그들이 무엇을 바꾸겠다고 말하는가. 진짜 독서가는 “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읽는다’가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읽는다’ ”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과도 싸우지 않는 작가에 대해 정혜윤은 관심이 없다. 정혜윤에게 <안과 겉>은 비참한 삶에 아름다움을 스며들게 하려는 반항적 청년의 투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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