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국가권력의 거짓과 잔인성에 일그러지는 ‘소년의 순수한 꿈’

한윤정 기자

▲오몬 라…빅또르 뻴레빈 지음·최건영 옮김 | 고즈윈 | 296쪽 | 1만2800원

고물 로켓모형이 있는 동네에서 자랐고 비행사들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했던 소년은 나중에 커서 우주비행사가 되기를 꿈꾼다. 그런데 그것이 1960년대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을 배경으로 한다면 그 꿈의 행로는 과연 어떻게 될까.

이 작품은 전체주의 체제가 개인에게 어떤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지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한 소년의 순수한 꿈을 체제 선전에 이용하고 나아가 목숨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권력의 거짓과 잔인성을 고발한다. 작가 뻴레빈(50)은 1992년에 처음 발표한 이 소설로 ‘포스트 소비에트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1994년 ‘뉴요커’는 가장 뛰어난 세계의 35세 이하 작가 6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뻴레빈을 꼽았고, 러시아 녹색당은 2000년 그를 총리 후보로 올리기도 했다.

[책과 삶]국가권력의 거짓과 잔인성에 일그러지는 ‘소년의 순수한 꿈’

주인공 오몬은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평생 경찰로 일한 아버지는 아들 역시 경찰이 되기를 바라면서 경찰특수부대의 약칭인 ‘오몬’이란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준다. 오몬은 자신처럼 우주비행사가 되기를 꿈꾸는 친구 미쪽을 사귀고 그와 함께 로켓을 주제로 한 어린이 여름캠프에 참여한다. 그런데 미쪽은 식당에 있던 마분지 로켓 모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밖에는 문이 표시돼 있는데 안을 뜯어보니 아예 문이 없는 것이다. 오몬과 미쪽은 바닥을 기어가는 기합을 받는데 이 일은 장차 두 사람에게 닥칠 운명을 암시한다.

시간이 흘러 두 소년은 자라이스크 붉은 깃발 항공학교에 입학한다. 면접관은 오몬에게 “우주로 비행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는 있나? 만약 조국이 자네에게 목숨마저 바칠 것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하겠나?”란 질문을 던진다.

작품의 배경에는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이라는 상황이 깔려 있다. 소련은 1957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해 우주개발의 우위를 선점한다. 그런데 이에 자극받은 미국이 1958년 인공위성 발사와 함께 1991년 유인우주선을 보낼 계획이라고 발표하자 소련은 급히 유인우주선 계획에 착수한다. 미국보다 빨리 유인우주선을 발사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1961년 유리 가가린이 우주비행에 성공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소련이 유인우주선을 발사한 적이 없고 가가린을 포섭해 거짓 작전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가가린이 108시간 동안 지구를 돌면서 단 한 장의 사진도 찍지 않은 게 근거로 제시된다. 7년 뒤 가가린은 전투기 시험비행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소련은 사고 원인, 비행기 잔해 등에 대한 정보를 기밀로 처리함으로써 음모론을 더욱 부추긴다.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불리는 빅또르 뻴레빈은 한국의 고 숭산 스님을 통해 선불교를 접했으며 한국에서 동안거를 하기도 했다.   |고즈윈 제공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불리는 빅또르 뻴레빈은 한국의 고 숭산 스님을 통해 선불교를 접했으며 한국에서 동안거를 하기도 했다. |고즈윈 제공

작품에서 오몬과 미쪽은 ‘까게베’(KGB) 제1과 부속 기밀우주학교 입학 대상으로 선발돼 혹독한 훈련과 정신교육을 받는다. 이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유인우주선을 타고 달 표면에 착륙하는 것이다. 그러나 귀환은 불가능하다. 아직까지 소련의 기술력은 귀환 가능한 유인선을 만드는데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억지로 영웅이 되기를 강요당해 절망한 오몬에게 비행 책임자인 대령은 “선진국을 염두에 둔 마르크스의 학설이 최고로 후진적인 국가에서 승리를 거두었듯이 우리는 거짓으로 진실을 지탱해야 한다”는 역설을 들려준다. 또 “영웅적 행위는 가령 그것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국가에는 불가결의 일”임을 강조한다.

작가는 키신저와 관련된 일화를 끌어들이면서 소련의 도덕적 타락을 풍자한다.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가 핵군축 가조약을 조인하러 러시아에 왔을 때 관리들은 사냥을 하면서 협상하는 게 유리하다는 아이디어를 내고, 한 아버지와 아들에게 곰 분장을 시켜 숲에 풀어놓는다. 키신저가 총을 쏠 것에 대비해 방탄옷을 입었으나 키신저는 총알이 빗나가자 칼로 아들을 찌른다. 그리고 죽어가는 아들의 시체 위에서 조약에 서명한다.

유인선 발사를 앞두고 당국은 약물을 투여해 탑승 비행사들의 정신력을 시험한다. 그 결과, 당성이 투철하지 못한 미쪽은 감쪽같이 없애버린다. 그리고 발사단계별로 쇼마, 이반, 오토란 기술자를 차례로 희생시키면서 오몬은 드디어 달에 착륙한다. 그런데 달 표면을 걷다가 쓰러져 죽은 줄 알았던 오몬이 깨어난다. 그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천국이나 사후세계가 아니라 거대한 스튜디오다. 가가린의 우주비행처럼 의문투성이의 현실이 펼쳐진다.

이 소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현실 자체가 가지는 허구성, 부조리함, 상대성 등의 감각을 그려냄으로써 냉전 시대에 소련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조지 오웰이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등 선배 작가들과의 차별성을 확보한다.

뻴레빈이 그려낸 잠재적으로 증가하고 붕괴되는 현실세계는 ‘시뮬라크르’의 상황에 놓인 현대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작가는 고 숭산 스님의 강의를 통해 선불교의 세계에 입문했고 한국에서 동안거를 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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