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고통의 신비로부터

[기고] 고통의 신비로부터*

아스팔트의 균열에서 자라는 들풀과
그 잎을 적셔주는 새벽녘의 이슬과
이슬 속에 담긴 태양의 공평함과
평등을 빼앗긴 노동자의 월급봉투와
그를 아버지로 둔 아이들의 멍울과
나에게 멍울을 물려준 나의 아버지의 길고 긴 한숨
의 도움을 받아
숨소리여, 그 소리를 공경하나이다

*
이모부가 죽었을 때에 너무 어려 잘 몰랐던 일과
큰아버지가 죽었을 때 너무 알고 싶었던 비밀들과
오빠가 죽었을 때 애써 모른 척하고 싶었던 외면들과
산재로 점철된 가족사의 알아야겠음과 살아야겠음의
어금니와 어금니의 앙다뭄과 억울해서 흘리는 짠 눈물과
나의 가족사와 우리들의 가족사의 닮은꼴
의 도움을 받아
내가 알고 있거나 알지 못하는 죽음들을
공경하나이다

*
죄를 지어라, 그러면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죄를 짓지 말아라, 그러면 벌을 받을 것이다
이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어떤 작별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놓여 있다
어떤 죽음은 목숨을 잃었어도 생명을 얻게 된다
이 말이 우리 앞에 도착하게 될 때까지,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사람이라서 사람에게
들어온 목소리를 들리는 목소리로
들어주소서

*
이제 우리들 각자의 것들을 모아주소서
한숨을
숨소리을
닮은꼴의 가족사를
죽음을
목소리를
사람을.

* 프랑시스 잠의 시 <고통의 신비>에서 제목과 형식을 빌려옴.


[시에 붙이는 한 마디]

아버지가 과자를 만드는 공장에 다니실 때 엄청나게 많은 과자를 집에 가져온 적이 있었습니다. 몇 달 정도를 그랬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일입니다. 그게 월급 대신 받아온 것이란 것도 모르고 그저 과자를 실컷 먹는다고, 친구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준다고 철없이 좋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전화를 받고 쓰러진 아버지를 보았고 소리내어 울던 엄마를 보았고 더 이상 출근하지 않던 아버지를 보았고, 너무 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딸 앞에서 언제나 죄인의 표정만 지으며 늙어가시는 아버지를 보아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난을 물려받았고, 누구에게나 주어진 멍에라며 묵묵하게 살아왔지만, 모든 부당함과 부당함의 점철과 부당함의 끝간 데 없는 오만과, 특히 그 오만에 길들여지는 것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이 시를 썼습니다.

견디지 말기로 합시다. 지금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덕기업과 독재자의 오만은 학살의 시대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기나긴 투쟁을 하고 있고 스물두 명의 동료를 잃은 쌍용의 해고노동자들에겐 지금-여기가 아우슈비츠와 다름이 없습니다. 한 철학자(조르조 아감벤)는 "아우슈비츠는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품위가 아닌 것이 되는 장소, 자신의 존엄과 자존을 잃지 않고 있었다고 스스로 믿었던 사람들이 그러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경험하는 장소이다"라고 했습니다. 품위를 잃지 않은 채로 자신의 존엄만을 위해 살다가는, 부끄러움보다 더 큰 치욕이 삶을 삼켜버릴까봐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오만이 우리의 존엄을 되찾아줄 때까지 말하고 말하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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