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노동자의 노예 사슬을 끊자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대학장

지난해 말, 인천지역 고속버스 파업 현장을 방문했던 날, 바다를 메운 매립지에 자리잡은 농성장에 바닷바람이 얼마나 세차게 몰아치던지, 말을 하려고 입을 열 때마다 흙먼지가 입안에 들어와 버석거리며 씹혔다. 빗물이 샐까봐 천막을 둘러싼 커다란 비닐 조각이 쫘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람에 찢겨 나갔다. 천막 모서리마다 고속버스 기사들이 달라붙어 거대한 마녀의 치맛자락처럼 펄럭대는 비닐을 천막 기둥에 붙들어 매느라고 씨름을 했다.

농성장 한쪽에 나란히 서 있는 고속버스 창에 붙어 있는 벽보들의 구호가 눈에 들어왔다. “하루 22시간 버스 운전, 4시간만 줄입시다” “최저임금 4320원, 10년을 일한 고속버스 기사 시급 4727원”. 당시 인천지역 버스 기사들의 평균 시급이 6722원이었다. 이게 과연 사실인가 싶어 물었더니, 사실이란다. 하루 22시간 운전은 예사고 24시간 운전도 해봤다고 한다. 졸면서 운전하는 경우가 많아 “막차 타는 손님은 목숨 걸고 타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동안 파업하지 않고 참아온 게 오히려 신기했다.

[하종강칼럼]버스 노동자의 노예 사슬을 끊자

노동조합이 엄연히 활동해온 회사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답은 간단하다. 어용노조였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어용노조’와 ‘민주노조’를 구별하는 기준은 단순하고도 쉽다. 노동조합 간부들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느라고 조합원들의 이익을 외면하면 어용노조요, 그렇지 않으면 민주노조다. 현장에서 일하다가 ‘회사 간부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직장 생활 좀 편하게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노조 간부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어용노조 집행부에 더러 있다. 회사 임원들과 상부상조하며 ‘노사화합’의 모범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와중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은 조합원들이다.

어용노조 간부들은 반짝거리는 새 버스를 운행할 수 있도록 회사가 배려해주는 경우가 많다. 노동조건 개선이나 임금인상 활동을 게을리 해, 회사가 비용을 절감할 수 있도록 협조해준 공로에 대한 보상이다. 노조위원장 자가용이 최고급 승용차로 바뀌기도 하고, 반지하 전셋집에 살다가 번듯한 아파트로 이사를 가기도 한다. 반면, 민주노조 간부들은 폐차 직전의 낡은 차를 운행하는 경우가 많다.(꼭 그런 것은 아니니, 혹시 새 차를 배정받아 운행하는 민주노조 간부님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지는 마시라.)

서울시버스노동조합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사용자 측은 서울 시내버스 기사들의 월 급여가 타 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라며 반박 자료를 냈다. 경기지역 229만8580원, 인천지역 283만7184원인 데 비해 서울지역 기사들은 325만8955원이나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500일이 넘는 장기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전북지역 버스 기사들은 그 반박 홍보물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또 무너져 내렸다. 비슷한 조건으로 일하고 있는 전북지역 버스 기사들의 월 급여 역시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기 투쟁 과정에서 이미 몸을 많이 상한 전북고속 남상훈 지부장은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쉰이 훌쩍 넘은 나이에 “이번에 버스노동자의 노예 사슬을 끊어야 한다”며 망루에 올라갔다. 결국 코피를 쏟으며 단식 49일째에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지역 토호 세력들인 버스회사 경영자들과 도지사 등 기관장들의 유착관계가 없었다면 벌써 해결되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것이 버스 노동자들의 주장이다.

파업 중인 버스 기사들의 간절한 목표는 일터에 복귀하는 것이다. 민주노총에서 탈퇴하면 복귀할 수 있으나 노동자들은 “죽어서라도 민주노조를 지키고 싶다”고 마음을 벼린다. 회사 사무실에 들어가 자기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을 기도했던 노동자는 경찰서로 연행된 뒤, 면회 온 부인을 보자마자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 들어가 버렸다. 그 부부의 마음이 오죽 아팠을까? 오죽하면 알몸시위조차 마다하지 않았을까? 노동자들의 돌출행동을 비난하기 전에 그 간절함에 눈을 돌리는 것이 도리다.

이제 곧 6월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25주년을 맞는다. 6월항쟁과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에 대해서는 그동안 정치적 민주화와 노동운동 역량의 비약적 성장에 초점을 맞춰왔지만, 사실 성장 일변도의 한국 경제가 분배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최초의 계기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었다. 울산지역 한 회사에서는 4년 동안 40원밖에 오르지 않았던 노동자 시급이 1987년 파업 뒤 무려 한꺼번에 124원이 오르기도 했다. “과도한 임금인상으로 회사가 도산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다가 회사가 흑자 경영 성과를 발표하자 오히려 놀란 노동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임금이 오르면서 노동자 구매력이 높아지자 외식산업 등 자영업과 레저산업 등 서비스업이 고속으로 성장했고, 한 자릿수에 머물렀던 가계저축률이 1988년에 25%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노동자들은 “민주주의가 밥 먹여준다”고 했다. 시민의 발을 책임지는 버스 노동자들을 노예 사슬에서 푸는 것은 지역사회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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