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사랑, 그 잊혀지지 않는 흔적을 그리다

한윤정 기자

▲그리고 사랑은
황주리 글·그림 | 예담 | 292쪽 | 1만3500원

“사람을 사랑하는 일의 끝을 우리는 안다. 텔레비전 정규방송이 끝난 뒤 화면의 침묵, 그 지지직하는 고요하지만 견딜 수 없는 소음, 산다는 일은 어쩌면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아주 짧은 순간 마주친 사람들끼리조차 깨알 같은 흔적 하나씩을 남기고 돌아선다.”

글 쓰는 화가 황주리의 그림소설집. 그동안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세월> 등 여러 편의 산문집을 냈으나 소설은 처음이고, 소설을 쓰는 2009년부터 올해까지 함께 그렸던 그림을 책에 넣었다. 황주리가 들려주는 아홉 편의 사랑이야기는 친근하고 따뜻하며 공감이 간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이야기이자 사랑하고 헤어지면서 살아간 각자의 인생이야기다. 단 소설의 무대와 정서는 대부분 작가 자신이 속한 7080세대에 맞춰져 있다.

[책과 삶]사랑, 그 잊혀지지 않는 흔적을 그리다

황주리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꼽은 ‘짜장면에 관한 명상’은 199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짜장면을 앞에 놓고 만난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다. 거지왕자 K는 예순이 넘은 부자 아버지와 아들을 낳아주러 들어온 젊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1학년 때 뉴욕으로 유학을 온다. 그러나 2년 만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돈 없이 귀족취향만 남은 룸펜이 된다.

유학생 H는 중학교 1학년 때 시집을 냈고 미국 학생들 앞에서 이상의 시를 강의한 경력 때문에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로 불린다.

그리고 화자인 나는 미국으로 이민 와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모의 딸이면서 김재규의 명령에 따라 1979년 박정희 암살사건에 가담했다 사형당한 군인 삼촌에 대한 상처를 갖고 있다.

세 사람 중 H는 교수가 돼 가장 먼저 한국에 가지만 발레리나와의 결혼생활이 파경에 이르고 파킨슨병에 걸린다. K 역시 한국에 돌아와 아버지의 유산 덕분에 안정을 찾은 뒤 이복누나가 경영하는 학교의 영어강사로 화자를 초빙한다.

1970~1980년대를 배경으로 주인공들의 인생유전을 그린 이 작품은 가족들 간의 상처,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 어긋나는 감정, 갑자기 닥친 불행과 이별 등을 도회적이면서 쓸쓸한 분위기에 담아낸다. 이들이 매번 함께 먹는 짜장면은 어릴 때 한국을 떠나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 간의 상징적인 공통분모다. 한국사람 치고 짜장면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책과 삶]사랑, 그 잊혀지지 않는 흔적을 그리다

황주리는 1987년 서른 살에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 10년간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 이국에서 느꼈던 자신의 고독감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

‘빨간 입술’은 립스틱을 진하게 발라 동네사람들에게 빨간 입술이라고 불리는 독신 여교사의 독백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초등학교 미술교사인 화자는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번듯한 단독주택을 마련한다. 그런데 며칠 안돼 옆집 남자가 문을 두드리며 수작을 건다. 냉정하게 거부하자 그는 매일 화자의 집 쪽으로 골프공을 날린다. 다른 이웃은 조폭에게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자 할머니, 화자의 집으로 죽은 쥐를 던지는 사이코 부부다. 화자는 자신이 다니는 성당의 신부를 사랑한 적이 있는데 고해성사에서 그 사실을 고백하자, 신부는 다른 성당을 거쳐 아프간 봉사단으로 떠나버린다. 어느 날 골프공 날리는 남자의 부인이 화자를 찾아와 자기 남편과 한 번만 동침해달라고 부탁하고 간 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프간에서는 탈레반에게 사살당한 신부의 유품이 도착한다.

현실의 사랑은 서글프고 엽기적이기만 한데 라디오에서는 뉴욕의 밸런타인데이 행사를 소개한다. 초콜릿도 녹고 장미꽃도 시드니, 영원한 건 바퀴벌레밖에 없다면서 바퀴벌레 5만8000마리에다 연인의 이름을 새긴다는 말을 들은 화자는 “초콜릿은 녹아야 제맛이고 장미꽃은 시들어야 제맛이지 바퀴벌레처럼 영원해서 또 뭐하겠어요?”라고 반문한다.

‘키위새가 난다’는 남성 화자의 눈을 통해 흘러간 청춘, 가슴에 묻어둔 첫사랑을 회상한다. 유능한 외과의사였던 화자는 의료사고를 경험한 뒤 자신의 인생에 대해 회의에 빠진다.

뉴질랜드를 여행하게 된 그는 그곳에 이민해 살고 있는 첫사랑을 떠올린다. 가난한 집안의 기둥인 의대생과 부유하고 아름다운 미대 여학생. 캠퍼스는 시위로 시끌벅적했지만 여학생의 화실은 두 사람에겐 아늑한 아지트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나면서 여학생은 점점 예민해진다. 평생 그녀를 감당할 자신이 없던 의대생은 의연한 의대 후배 여학생을 택해 결혼한다. 이제 중년에 이른 화자는 후회와 미련이 많다. 첫사랑을 내팽개친 것, 냉정하고 무뚝뚝한 아내와 결혼한 것, 의사가 된 것까지. 날개가 퇴화해 날지 못하는 뉴질랜드의 키위새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 주인공은 번지점프를 시도한다.

화가 황주리의 소설은 독특한 맛이 있다. 팝아트 풍의 세밀한 그림처럼 이야기가 풍성하고 구성이 조밀하다. “상상 속의 인물인 동시에 내 곁의 실제 사람들, 그리고 내 안의 분신들”의 이야기에서 “사랑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우리들 삶의 잊히지 않는 장면들”임이 느껴진다.

황주리는 책에 수록된 그림을 포함한 ‘사랑의 풍경’전을 오는 13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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