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소수 언어의 소멸… 문화도 기억도 지혜도 한꺼번에 사라진다

문학수 선임기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니컬러스 에번스 지음·김기혁·호정은 옮김 | 글항아리 | 500쪽 | 2만3000원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서재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 아프리카의 지성으로 불렸던 전통학자 아마두 함파테 바가 1960년 유네스코 연설에서 했던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니컬러스 에번스의 문제 의식도 동질하다. 그는 책의 프롤로그에서 영어 식으로는 팻 가보리(Pat Gabori), 원주민어인 카야르딜드어로는 ‘카바라르징가티 불투크’라고 불리는 한 노인을 소개한다. 카야르딜드어는 호주 퀸즐랜드 주 벤팅크 섬의 원주민 언어다. 지난 40년간 시력을 잃고 살아온 불투크 노인은 현재 여덟 명밖에 남아 있지 않은 이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 가운데 한 명이다. 책에는 그의 사진이 수록돼 있다. 화려한 색깔의 모자를 썼고 나무를 꺾어 만든 지팡이를 짚었다. 흰 수염과 눈썹으로 덥수룩한 얼굴은 나이를 가늠키 어렵다. 저자는 노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가 자신이 자라온 세계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시력을 잃은 까닭에서일 것이다. 그는 벤팅크 섬의 산성 지역이나, 뛰어난 사냥 기술, 복잡한 부족 계보, 여인을 둘러싼 다툼 등에 대해 몇시간씩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가끔은 이야기를 멈추고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이제 그의 이야기와 노래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책과 삶]소수 언어의 소멸… 문화도 기억도 지혜도 한꺼번에 사라진다

호주국립대 교수인 저자는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다. 다양한 호주 토착민 언어를 연구하고 학습해온 통역사이기도 하다. 40년 가까이 사라져가는 언어 현장을 누벼온 까닭에 ‘현장 언어학자’로 불린다. 이 열혈 교수가 앞서 언급한 불투크 노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82년이었다. 당시 카야르딜드어 사용자는 40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나마 모두 중년을 넘겼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저자에 따르자면 “카야르딜드어의 운명은 1940년대에 결정”됐다. 벤팅크 섬의 주민들이 정부 정책에 따라 “조상의 땅에서 50킬로미터 북서쪽에 있는 모닝턴 섬으로 이주”하면서부터 그들의 언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는 얘기다. “이주 당시만 해도 모든 주민은 카야르딜드어를 쓰는 단일 언어 사용자들”이었지만 “그후 단 한 명의 아이도 이 부족어를 완전히 익히지 못했으며, 한 아이에게서 다른 아이에게로 전해지는 언어의 동세대간 연결”도 깨지고 말았다. “정부의 기숙사 정책에 따라 아이들은 거의 하루 종일 부모와 떨어져 있어야 했으며, 원주민어를 말하는 아이들은 벌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이 밖에도 수많은 소수 언어들의 운명을 목격하면서 “이렇게 근사한 언어들이 침묵 속으로 소멸할 때, 그 공동체는 물론 학계가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면서 느낀 절망감”이 책을 쓴 동기였다고 밝힌다. 물론 소수 언어의 소멸이 단지 호주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소규모 언어공동체를 유린하는 비극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현재 전 세계 6000개 혹은 그 이상의 언어들 사이에서 언어 소멸의 속도는 급격히 빨라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2주마다 한 명씩, 세계 어느 곳에선가 쇠미해가는 언어의 마지막 화자가 죽음을 맞고” 있으며, 그래서 결국 금세기 말이면 6000개 언어 중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추정한다.

책이 쓰여질 무렵, 전 세계에 8명 남은 카야르딜드어 사용자 중 한 명이었던 팻 가보리.

책이 쓰여질 무렵, 전 세계에 8명 남은 카야르딜드어 사용자 중 한 명이었던 팻 가보리.

한국도 그 추정을 비켜가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10년 12월, 유네스코의 ‘소멸 위기 언어 레드북 홈페이지’에는 제주어가 인도의 코로어와 함께 소멸 위기 언어로 등재된 바 있다. 제주어는 유네스코가 기준을 정한 소멸 위기 언어의 네번째 단계인 ‘아주 심각한 위기에 처한 언어’로 규정됐다. 마지막 단계인 ‘소멸하는 언어’의 바로 아래 단계에 해당한다.

저자는 왜 언어 소멸의 현장을 발로 누비며 다양성을 주장하는가. 그는 “현지 답사를 하다보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언어들을 발견하게 되며, 그래서 가능성의 경계를 계속 수정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말한다.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의 상상은 표준어라는 규범에 갇혀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저자는 언어야말로 인간의 다양한 삶과 역사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거울임을 강조한다. 그는 “언어가 없었다면 인간은 다른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인간은 아주 오랜 세대에 걸쳐 누군가를 설득하고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환심을 사고, 혹은 누군가를 속이거나 배척하려는 시도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대한 체계를 구축”해왔는데, 그 매개는 오로지 언어였다는 얘기다. 그래서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진화를 간직하고 대변한다.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 언어를 구사한 이들이 고수해온 전통과 지혜,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문화의 여러 장면들을 한꺼번에 잃는 것”이다.

사라지는 언어에 대한 저자의 탐사는 학자적 연구를 뛰어넘어, 씁쓸함과 애도의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저자가 만나온 숱한 증언자들은 속속 세상을 떠나고 있다. 저자는 그 원로들의 장례를 직접 주재하면서, 하나의 언어가 마침내 운명의 막을 내리는 장면을 수없이 목도한다. 그가 보기에 언어의 소멸은 종교나 사상의 소멸보다 외려 장엄하고 비통하다. 저자의 치열한 현장주의와 소멸하는 언어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노작이다.

저자는 한국어판 머리에서 이 책을 번역자인 고(故) 김기혁 교수에게 바친다고 적었다. 경희대 국문학과의 김기혁 교수는 책을 번역 중이던 지난해 4월 지병으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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