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에서 정신분석은 환자를 치료하는가

맹정현 | 정신분석가

정신분석 통한 치료에는 소홀… 문화의 분석도구로 전용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는 신대륙을 발견한 지 100년이 되었지만,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주된 화두로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인 것 같다. 1990년대 말쯤이었던가? 인문학계에 불어닥친 프랑스 사상의 열풍 속에서 프로이트 전집이 번역된 것이 경이로워 보였지만, 생각해보면 당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과는 무관하게, 소위 포스트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에 덤으로 끼어서 ‘주체의 죽음’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사유의 한 갈래 이상은 아니었다. 이후 2000년대에 찾아온 인문학 열풍은 ‘인문학적으로’ 해석된 정신분석학을 한층 더 통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건만, 그 관심은 인문학이 설정해 놓은 경계선을 넘어서진 않았다는 점에서 그 한계 역시 명백했다. 일종의 전문화된 아마추어리즘이라고 해야 할까? 인문학자들은 정신분석 개념들의 독창성에 매혹되어 그것들을 매우 대범하게 문학작품과 문화적인 현상들에 적용하며 즐거워하곤 했지만, 막상 실천의 차원에서 인간 정신에 적용해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머뭇거렸고 전문화된 정신분석 연구로까지는 길을 넓히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것은 정작 정신분석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곳에서 그러한 관심에 적절하게 응하지 못했다는 것에도 원인이 없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신분석이 있어야 할 자리는 원래 정신의학과 심리학, 그 옆이 아니던가? 정신분석의 수용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은 이웃 나라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국내 최초의 정신분석가라 알려진 김성희가 1940년대 일본에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며 분석 교육을 받고 귀국해 전남대에 정신의학과를 창설한 후, 나름 정신의학계는 정신분석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토록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지금껏 정신분석학이 우리 문화 속에 안착하지 못한 것은 정신의학이 정신분석을 ‘학(學)’이 아닌 ‘술(術)’로 바라보는 관점과 특유의 엘리트주의에 갇혀 대중과 인문학자들의 요구에 충분히 화답해주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심리학 관련 저널이나 심리학 학위 논문에서 정신분석과 관련된 연구들을 거의 찾아볼 길이 없다는 것도 이러한 상황을 방증한다. 정신분석에 관심을 갖는 소수의 심리학자들이 있긴 했지만, 이들 역시 정신분석을 연구 대상보다는 치료를 위한 기술 정도로 치부하는 학계의 분위기를 크게 바꾸진 못했다. 특히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심리학이 스스로를 강박적으로 계량화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인간과학에서 사회과학 쪽으로 옮겨감에 따라 질적인 연구보다는 양적인 연구가 우선시되었고, 급기야 정신분석에 대한 연구는 문학 연구가들의 몫이 되어버렸다.

■ 문학 연구자들의 전유물이 된 정신분석학

이것이 정신분석과 관련한 국내 학계의 부조화스러운 현실이라면, 이러한 부조화의 직접적인 피해는 대중의 몫이 될 것이다. 막상 정신분석 치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먼 나라 이야기인 듯 선뜻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다. 용기를 내어 분석가와 약속을 잡고 카우치에 누워보지만 분석의 방법들은 너무나 낯설기만 하다. 혹은 조급한 마음에서 정신분석에 무슨 마술 같은 치료법을 기대하면서 단 몇 회의 세션만으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환상에 불과하다.

외국영화에 등장하는 몇몇 장면을 동경하며 분석에 임하지만 정신분석의 제1 원칙,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라”는 ‘자유연상’의 원칙을 실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는 게 당연하고,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서 애초의 증상을 만들어낸 것인 만큼, 그것을 털어놓는 것도 지난한 일이다. 하물며 그것이 성적인 주제를 암시할 때는 정신이 다시 한번 경직되곤 한다. 물론 환자의 의식이 보이는 저항감을 대신해 그의 꿈이나 말실수나 행간이 무의식을 대변해주기에 정신분석은 나름 지원군이 없진 않지만, 한국 문화 특유의 조급함은 분석에 대한 저항감을 드러내곤 한다.

정신분석 치료에 대해 별로 알려진 바가 없기에 정신분석과 기타 유사한 영역, 가령 정신의학이나 심리치료 사이에서 도대체 어떤 치료법을 택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의 차이를 단적으로 설명하자면, 정신의학은 인간의 정신질환을 하드웨어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정신분석은 동일한 문제를 소프트웨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고 할 수 있다. 컴퓨터를 쓰다보면 하드웨어에 고장이 날 수도 있지만 소프트웨어의 운용이 잘못되어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듯이, 인간은 특별한 기관의 오류가 없이도 생각이나 경험의 차원에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약물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자를 겨냥한다면, 정신분석은 소프트웨어상의 문제는 그 소프트웨어가 운용되어온 특수한 방식들을 점검할 때에만 해결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유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히면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자신의 삶이 그동안 삶의 지표로 삼았던 보편적인 매뉴얼들에 의해 지탱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애초에 엉켜버린 삶의 실타래를 삶 자체 속에서 푸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정신분석이 다른 모든 ‘심리치료’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전제라면, 정신분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문제의 원천이 의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차원에 있다는 테제를 고수한다. ‘무의식’이란 인간 내면 속의 어두운 힘, 야만적인 힘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오면서 지워버렸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현재 모습을 결정한 삶의 흔적들이다. 내가 사랑했지만 잊어야 했던 연인들의 흔적이며, 내가 되고자 했지만 될 수 없었던 이상의 흔적들이며, 나를 낳아준 사람들과 나를 길러준 사람들이 내게 건넨 말과 욕망들의 흔적이다.

마음의 병이 이러한 흔적들이 불러일으킨 심리적 갈등의 결정체라면, 그런 흔적들이 나의 의식 저편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 치료는 심층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만큼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치료가 심층적이어야 하는 만큼, 정신분석은 면담 형식의 상담과 달리 ‘카우치’라는 긴 의자에 환자를 누인 채 자유연상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자유연상이란 자아가 자신에 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수준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자신에 관한 진실을 스스로 이야기하게 되는 지점까지 그 자아를 이끌기 위한 방법이다. 요즘 유행하는 ‘코칭’이나 단기적인 상담치료가 썩은 가지나 잎사귀를 솎아내는 작업이라면, 정신분석은 이러한 심층적인 방법을 통해 줄기를 병들게 한 마음의 뿌리가 튼튼해질 수 있도록 뿌리의 위치를 바꾸고 흙을 갈아주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겨냥하는 목표가 다른 만큼 치료를 위한 방법 역시 다를 수밖에 없을 텐데, 분석은 직접적인 치료효과를 줄 수 있는 쉬운 방법들을 스스로 마다한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치료를 위해 겨냥하는 모든 시도들을 ‘furor sanandi(치료에 대한 열망)’라 칭하면서 경계했는데, 이는 치료과정이 직접적으로 목전의 치료를 겨냥하게 되면 오히려 환자의 심리적 갈등이 더욱 강화되고 병세가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울함에 빠져 있는 환자에게 그를 괴롭히는, 삶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교정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그의 장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이야기를 해준다면 전혀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의 우울한 마음이 자신의 행복함을 견딜 수 없는, 스스로 자신에게 행복감을 차단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호전될 것 같던 우울한 감정은 ‘당신도 행복할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대해 내성을 갖춘 채 보다 더 강력한 형태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는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개인 안에 있는 ‘분열된 주체’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또 바로 이런 이유에서 프로이트는 ‘죽음 충동’이란 용어를 만들어냈던 것이고, 또 그런 한에서 분석 치료는 직설적인 것이 아니라 에둘러가는 길일 수밖에 없다.

■ 정신분석이 대중의 곁으로 다가가려면

앞으로 정신분석이 정착하기 위해선 풀어야 할 현실적인 난제가 적지 않다. 일단 심리적인 고통을 받는 이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분석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분석의 문턱이 낮아져야 할 것이다. 미국적 보수주의로부터 비롯된 결과인지 프로이트적 정통성의 증거를 내세우기 위한 방편인지는 몰라도 현재의 방법과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계층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프로이트가 제안한 것처럼 주 4~5회, 1회 50분, 수년에 걸쳐 진행될지도 모르는 치료는 바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흥미롭게도 프로이트 시대를 보면, 환자들이 프로이트에게 분석을 받기 위해 먼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당시 전 유럽을 통틀어 분석가가 프로이트와 그의 몇몇 제자들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환자들 자체가 워낙 시간과 돈에 제약이 없는 부르주아 계급의 지식층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 하겠다.

일찍이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은 무의식의 시간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무의식이라는 것이 상식적인 시간과 같은 논리로 작동하는가에 의문을 제기했는데, 그에 따르면, 무의식은 연속적인 발달의 논리가 아닌 비약의 논리에 의해 작동한다. 그가 이러한 시간관을 주장하면서 분석 세션의 시간을 유동적으로 취할 것을 제안했던 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쟁점만은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론적인 쟁점을 빌미로 국제정신분석학회(IPA)로부터 제명당한 유일무이한 분석가가 되었다.

하지만 정신분석이 탄생한 지 벌써 한 세기 이상 지났고, 삶의 평균적인 질 역시 향상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내면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 결과 정신분석에 대한 요구는 좀 더 다양화되었다. 정신분석이 부자들을 위한 고급 취미 같은 것으로 전락해버리면서 대중이 점차 정신분석을 외면하게 된 미국과 달리, 모든 계층을 위해 자신을 낮추면서 대중의 요구에 유동적으로 적응해온 유럽의 정신분석은 우리의 정신분석이 나아갈 길에 많은 시사점을 제시해줄 것이다. 우리의 정신분석은 좀 더 대중의 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여타 학문들에 기생하지 않고 정신분석학이 자생할 수 있는 장, 정신분석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정신분석가들을 양성할 수 있는 고유한 장이 조속히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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