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의 불가능성

정희진 | 여성학 강사

1995년 쓰레기종량제가 실시되었을 때 종량제가 친숙한 용어였던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종량((從量). 쓰레기 배출량에 따라 요금을 차등 부과하고 수수료의 기준은 양에 따른다(從)는 것이다. 무게나 크기가 아니라 양이 기준이다. 이를 측정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부피이며, 봉투는 ℓ 단위로 판매되고 있다. 부피가 유일한 척도이기에 사회적 합의가 쉽다. 쓰레기의 용도와 수분 함유량이라는 변수를 보완하기 위해 음식 쓰레기봉투는 따로 판다. 이처럼 종량제에서 ‘따를 종’의 의미는 분명하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종북’의 불가능성

종북(從北), 종미(從美). 요즘 뉴스를 뒤덮는 이 언설에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 사회는 후퇴했다. 친미, 반미, 반북…. 예전에는 언어가 양순했다. “친근감을 느끼거나 반대함”에서 “최고의 가치로서 맹목적으로 따름”으로 변한 것이다. 이는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인식론적 전환이다. 추종은 ‘하느님’ ‘부처님’ 생명, 자연처럼 아무리 진선미한 대상이라도 배타성을 전제하므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종북의 정체, 실재, 그들의 태도와 행동이 미치는 악영향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런 비교 자체에 역정을 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특정 국가나 ‘반국가단체’를 맹목적으로 숭상하는 집단 외에도 종교, 패션, 외모, 학벌, 돈에 절대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모든 판단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종북, 종미가 이들보다 특별히 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독단적인 신념, 열정과 헌신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인생을 살맛나게 하는 측면이 있다. 문명은 가벼운 조증(躁症)에서 발전하기 마련이다. 누군들 약간은 슬프고 외로운, 그래서 사유가 요구되는 울(鬱) 상태가 지속되기를 바라겠는가. 사랑, 집착, 숭배, 열광, 확신….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일인지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히틀러는 이러한 인간 속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한 정치가였다.

성적 소수자나 장애인, 여성운동가 중에서도 지나치게 비타협적인 열정 과잉인 사람들이 있다. 나도 어떤 이들에게는 ‘꼴통 페미’로 불린다(민망한 사족이지만 내가 그 정도로 치열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끼리도 진정한 ‘종(宗)’을 두고 싸우는 경우가 있다. 오죽하면 ‘에코 파시즘’이라는 말이 있을까. “불신지옥”을 강요하는 모 종교의 역(逆)선교 방식이나 밀교를 방불케 하는 물건 판매조직의 폐단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그런데 왜 이들의 맹목성은 종북이나 종미만큼 혐오, 비난의 도마에 오르지 않을까? 그리스어의 “생각하다”에서 유래한 도그마(dogma)가 오늘날 “생각하지 않음”을 의미하게 된 것은 역설이 아니다. 생각함이나 생각하지 않음이나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이 문제는 독단 대 이성의 사안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이해관계의 정치학이기 때문이다.

종북과 종미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코 대칭적이지 않다. 전 지구가 사정권인 미사일로 무장한 유일 초강대국을 추종하는 사람과 지구상 최빈국을 맹종하는 사람의 정신상태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무의식을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종북과 종미는 그들 나름의 각기 다른 이유와 목적이 있다. 나는 추종의 진위가 아니라 그 불가능성과 언어 자체의 위험성이 논의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쓰레기종량제처럼 따를 대상이 유일하고 뚜렷한 경우의 복종(?) 행위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종북이나 종미는 대상이 없다. 인도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반세계화, 반미활동가로도 유명한데, 그녀는 반미주의자라는 지적에 이렇게 말했다. “반미란 무엇인가요? 저는 미국의 재즈,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나무, 미국의 인권운동가를 사랑합니다. 저는 친미도 반미도 아닙니다.” 그녀의 문맥에서 반미의 대상은 부시 행정부 정도일 것이다.

로이의 말을 종북에 적용해 보자. 종북 세력은 북한의 무엇을 맹종한다는 말인가. 금강산의 풍광? 선군(先軍)정치? 백두산 천지? 기아 상태의 인민들? 온면? 냉면? 주체사상? 만일 주체사상이라면 가장 심각하다. 사상은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비판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북한도 미국도 각기 균질적인 하나일 수 없다. 국가는 지칭을 위한 재현, 즉 표상이지 실체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북한인권과 관련해 가장 핵심적인 논점은 권력층과 고통받는 인민을 구별하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권 지원이 반북, 친북 정치로 이용당하지 않는 ‘순수한’ 인권운동이 될 수 있고 절실한 필요에 부응할 수 있다. 이 구별을 왜 종북 담론에는 적용하지 않는가? ‘종북’ ‘종미’ 사용은 북한이든 미국이든 공동체의 주적(主敵), 혐오하는 타자, 왕따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어쩌면 이들의 존재 자체보다 이러한 지시 행위가 더 위험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종파적 행동이다. “너, 그거지?” 누구든 언제든 타인을 심문할 수 있는 권력. 혹시 우리는 모두 양비론을 가장한 채 이러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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