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아파하는 건축물

이필렬 | 방송대 문화교양학부 교수

1년 전쯤 우리나라의 이름있는 건축가들이 어느 신문사의 부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을 선정한 적이 있다. 그 중 네번째로 뽑힌 것이 파주출판단지다. 선정 이유는 “지형을 최대한 살린 친환경적 도시의 가능성”이었다. 출판단지에 들어가보면 정말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단지 가운데를 길게 가로지르는 자연상태의 습지 양편으로 다양한 디자인의 현대 건축물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거기에다 아담하면서 고풍스러운 한옥 한 채가 멋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녹색세상]자연이 아파하는 건축물

그러나 친환경이라는 말을 기준삼아 건축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곳은 점점 미심쩍은 장소로 변한다. 그곳 건축물은 대부분 쇠와 콘크리트, 유리와 돌로 이루어졌다. 모두 제조할 때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고, 따라서 그 자체로는 친환경의 기준을 통과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더라도 앞으로 수십년간 건축물을 사용할 때 들어가는 에너지의 양이 많지 않다면 초기의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건물들은 처음부터 그에 대한 고려를 아예 생략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반성할 수 있는 가능성도 폐쇄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어떤 건물은 철골로 얼개를 짜고 그 사이는 유리로 채웠다. 철골을 받치고 서 있는 굵은 원통형 철기둥은 절반이 건물 안쪽에 들어 있고, 나머지 절반이 바깥쪽에 나와 있다. 보고 있으면 건축가가 현대적 디자인 실험을 앞세워 기후파괴 실험을 마음껏 즐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저녁 무렵 마침 건물을 나서는 이용자들에게 지난겨울에 어떠했는지 물었다. 바닥에서 난방을 하고 온풍기를 돌리는데도 추워서 힘들었다는 대답이 금세 돌아왔다. 예상했던 답이다. 철골과 철기둥을 통해서 에너지가 조금도 방해받지 않고 쉼없이 빠져나오는 형국이니 불을 아무리 때주어도 따뜻해질 리 만무다. 이런 건축물은 교정이 불가능하다. 앞으로 건물이 수십년간 자행할 기후파괴를 막을 방도가 없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멀쩡한 건물이지만 사용하지 않고 그냥 방치하든지, 부수고 새 건물을 짓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친환경을 강조하기 위해 외벽을 치장한 나무 마감 부분도 찬찬히 뜯어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다. 표면은 고정핀에서 흘러내린 녹물로 얼룩져 있고, 군데군데 썩어가는 곳도 있다. 나무와 콘크리트 외벽면 사이에 바람길을 내준 곳은 어떤 건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어떤 건물은 콘크리트벽에 얇은 유리솜을 붙이고 그 위에 바로 나무를 댔다. 공기가 통하고 물이 닿지 않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 배려가 조금도 없다. 스며든 물이 빠져나갈 수 없으니 아래쪽에서 썩거나 곰팡이가 피는 것은 당연하다.

홑겹 유리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홑겹은 두겹짜리보다 두 배 이상, 세겹짜리보다는 10배나 빠르게 에너지가 빠져나간다. 건축가들이 디자인만 생각했지 친환경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는 건축가들이 한국의 두번째 대표건축물로 ‘공간’ 사옥을 뽑았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선정 이유로 신구 사옥의 대비가 주는 세련미를 들었다. 그런 멋을 느낄 수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유리옷을 입은 신사옥이 겨울과 여름에 얼마나 춥고 더운지, 이를 다스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지 조금이라도 따져보았다면 공간 사옥을 이 시대 한국 최고의 건축물 반열에 올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파주출판단지나 공간 사옥을 한국의 유명 건축가들이 최고로 꼽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여전히 근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근대인은 자연은 무한하고 인간은 그 자연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후변화, 체르노빌·후쿠시마의 원전사고는 모두 그런 생각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시대의 과제는 근대적 자연관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유리로 덮인 공간 사옥이나 파주출판단지의 건물들은 근대가 낳은 위기를 부추기는 것으로, 최고가 아니라 최악으로 선정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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