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위원 의식 않은 낙선작… 제 본심을 보여주고 싶었죠”

한윤정 기자

작가 심재천 작품집 ‘본심’

“등단작은 어떻게 하면 당선될까, 심사위원들의 눈치를 살피고 계산한 것 같아요. 그런 마음이 들기 전에 정말 소설만을 생각하면서 썼던 작품들을 가지고 제 ‘본심’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11월 중앙장편문학상에 <나의 토익 만점 수기>로 등단한 작가 심재천씨(35)가 등단 준비기간에 썼던 소설 중 예심을 통과한 단편을 묶은 소설집 <본심>(웅진지식하우스)을 펴냈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가졌던 순수한 본심(本心)인 동시에 심사의 본심(本審)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세계일보 문화부 기자로 3년여 일했던 그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2008년말 회사를 접었다. 곧바로 ‘깃’이란 작품이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본심에 오르자 등단에 자신감이 생겼다. 이어 문학동네 신인상에 ‘베레타’를 응모했는데 본심에서 최종 3편에 올랐다가 떨어졌다. “내심 당선작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류보선)는 평가까지 얻었다가 안되고 나서 6개월간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1년이면 될 줄 알았던 준비기간이 무작정 길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재연’ ‘신준’ ‘유유이’ 등의 필명으로 일년 내내 투고했지만, 본심에 오른 확률은 2할5푼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3년여 그는 단편 30여개, 중편 1개, 장편 1개를 썼고, 마침내 장편으로 등단했다.

신인작가 심재천씨는 “나를 끊임없이 배반해 가려고 한다. 머무르면 끝장이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신인작가 심재천씨는 “나를 끊임없이 배반해 가려고 한다. 머무르면 끝장이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제가 <본심>을 묶어내려고 하니까 말리는 분들이 많았어요. 보통 등단 이전에 썼던 작품을 고쳐 신작으로 발표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심사위원 입장에서 보면 ‘당신은 나를 떨어뜨렸지만 다르게 봐줄 사람도 있다’는 시위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저처럼 혼자 등단준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낙선작과 심사평은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본심>에 실린 7개의 단편 가운데 그가 가장 아끼는 작품은 ‘산’이다. 미숙아로 태어나 혼자인 아이는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땅에 묻어 높은 산을 쌓는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집과 가재도구, 아이를 낳다 죽은 미혼모, 청동흉상…. 군인들이 나타나 제재하지만 그들을 피하기 위해 더욱 높이 쌓는다. 심씨는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초탈하고 싶은 열망을 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심사평은 “알레고리가 도식적”(박성창)이라는 것이었다.

‘베레타’는 평범한 직장인이 권총을 손에 넣으면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화자는 어느날 아침 초라한 전기밥솥 옆에서 ‘베레타 M9’을 발견한다. 권총의 존재는 직장에서 억압 받는 그에게 용기와 위로를 준다. 그러나 권총을 없애고 싶었던 아내는 경찰을 부르고, 절망한 주인공은 아내를 인질로 잡기에 이른다. 형편 없이 위축돼 틀에 박힌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잉글리시 티처’와 유일하게 예심을 통과하지 못한 ‘아내의 펠라티오 향방’ 역시 작가가 아끼는 작품이다. ‘잉글리시 티처’는 고향에서 마약과 매춘으로 시간을 보내던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유명 영어학원 강사를 거쳐 학원장으로 성공하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등단작인 장편 <나의 토익 만점 수기>의 모태가 됐다.

“소설은 자기연민, 자기고백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눌러야 허구적인 세계를 꾸밀 수 있는 거죠.”

그는 우리 주변의 사물과 사건은 물론, 인간 자체를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자기 소설의 목표로 삼았다. 사람은 원래 천박하고 속물스럽고 멍청하고 각자의 개성이 다른데 교육의 힘으로 그걸 장막 속에 숨긴 채 살아간다. 그러나 이런 허식은 사람들을 신경증과 강박증에 걸리게 하고, 잘 속아넘어가게 만든다. 예를 들어 남들을 따라 무조건 영어공부를 하고 취업을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열등인간 취급을 받으면서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심재천표 소설은 인간의 거친 이면을 드러냄으로써 획일적 세계관을 거부하는 소설이 될 것이란 목표를 습작기간 중 얻게 됐다.

작가로서 출발선에 선 심씨는 “팔릴지 안 팔릴지, 영화가 될지 안 될지를 생각하지 않고 소설만을 생각하겠다”고 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소설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분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장편의 흥행 성적은 1만권. 이미 두 번째, 세 번째 장편을 계약했다. <본심>을 통해 자신의 본심을 보여준 그는 새로운 작품을 위해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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