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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의 추억, 환멸의 운동, 헐벗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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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의 추억, 환멸의 운동, 헐벗은 인간!

[프레시안 books] 권여선의 <레가토>

첫사랑에 대한 기억에 있어 남녀의 차이에 대한 새로운 발견 하나, 여자는 대체로 애틋하고 아름다운 과거로 추억하는 경향이 있고 남자의 경우는 치욕과 관련하여 되새긴다는 것이다. 남자의 경우, 첫사랑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저버리는 그 어떤 지점에 강박되어 있기 쉽다는 것인데, 물론 이건 모든 남자가 그렇다고 일반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첫사랑'이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코드에 있어 개인차가 있으나 아련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통념 밑에서 어떤 이들은 거절당한 치욕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여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저 기이한 박남철의 '첫사랑'이라는 시도 사실, 이러한 알 수 없는 정념의 겹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요는 남녀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해 보이는 감정들 안에 도사리고 있는, 혹은 사실 밑에 켜켜이 새겨진 감정의 층위들을 말하는 것이고 특히 통념적으로 애틋함과 행복함이라 생각되는 '사랑' 안에 숨겨진 수치와 모욕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단편집 <분홍 리본의 시절>(창비 펴냄)의 작가 권여선은 이렇듯 안전하게 정리된 듯이 보이는 감정들을 헤집고, 논리를 뛰어넘는 정념들의 역학을 성찰하는 데 탁월한 작가이다. <푸르른 틈새>(문학동네 펴냄) 이후 처음 펴낸 장편 <레가토>(창비 펴냄)에서도 권여선의 이 특장은 그대로 작품의 훌륭한 프레임이 된다.

▲ <레가토>(권여선 지음, 창비 펴냄). ⓒ창비
"앞선 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음 음은 이미 시작되는 그렇게 음과 음 사이를 연주하는 '레가토' 주법"('작가의 말')은 이 작품에서 세 가지 코드로 진행된다. 첫 번째 시간적 차원에서, 현재에 겹쳐있는 과거의 흔적. 국회위원 박인하, 그의 보좌관 조준환, 출판기획사 사장 신진태, 국문학과 교수 이재현 등의 중년에게 어느 날 유하연이라는 여인이 나타난다. 유하연은 과거 이들과 '전통 연구회'라는 운동 서클을 함께 했으나 실종된 오정연의 동생임을 자처하는데, 이 유하연이라는 돌연한 존재의 등장은 이들에게 1979년의 한 시기를 되돌려준다.

1979년, 이 엄혹한 시절에 이들은 '카타콤'이라는 불리는 지하 동아리방에서 함께 독재자를 비판하고 시위에 나섰던 운동권 동지들이었다. 피세일(유인물 배포)에 처음 나선 오정연은 그날 뒷풀이에서 '공포'에 대해 고백하고, 이용호라는 선배에게 얻어맞고 만취되어 회장 박인하의 자취방에 업혀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정연은 박인하에게 순결을 잃게 되는데, 이 오정연과 박인하이 겪은 하룻밤은 또 하나의 중요한 정념의 레가토가 된다.

냉혹한 이념의 화신이자 민주투사인 박인하는 오정연을 안으려다 거절당하자 그녀를 강간한다. 그러나 이 '성폭행'은 단순히 폭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를 보는 순간 그녀를 만지고 싶었고 살을 맞대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매혹이 낯설었고 거절당할까봐 수치스러웠다. 그 낯선 수치감이 이러게 끔찍한 사태를 불러올 줄은 몰랐다"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 오정연에 대한 강제 성추행에는, 여배우의 사생아라는 자신의 콤플렉스와 소영웅주의, 열망과 치욕으로 얼크러진 사랑의 정념을 처리하지 못한, 미숙한 젊은이의 치기가 들어있는 것이다. 오정연의 편에서도 이 얼크러짐은 마찬가지이다.

표면적으로 오정연은 박인하에게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한 피해자이지만 밑그림은 이와 다르다. "새빨간 증오와 혀를 깨무는 무력감과 미칠 듯한 분노가 휙휙 스쳐가다 마침내 서리처럼 하얗게 체념이 내리는 표정"으로 박인하를 받아들여 '한 스푼의 피'를 쏟고 만 오정연은 박인하를 밀쳐내면서도 한편 그에게 끌린다. 오정연은 박인하에게 일을 당한 뒤, 곧 그를 떠나지 않고 체한 그의 손을 따고, 김밥을 먹인다. "나도 잘 체하는디 혼자도 잘 따요. 한나도 안 아파요. 체해서 아픈 데 비할까이. (…) 나가요, 지금 본께 어저께 뭣이 그리 무서버서 그 고약을 떨었는가 모르겄소"라며 다정하게 박인하를 어루만져주고, 또 "벌거벗은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싸구려 휴지로 아랫도리를 닦으며 '보헤미안 랩소리'를 흥얼"거리는 그녀에게 박인하는 단순히 가해자가 아니라 육체의 비루함과 '치욕'을 공유한 동지이자 무의식이 갈망했던 정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불가해한 사건 이후, 냉담한 거리를 유지하던 이들은 한 달이 지난 즈음 다방에서 만나기로 하지만, 이 화해와 새로운 결속을 암시하는 만남은 끝내 이뤄지지 않는다. 박인하는 오정연을 만나러 오다가 결국 '짭새'에게 붙들려 오랜 동안 감방에 있게 되고, 박인하의 아이를 밴 정연은 휴학계를 내고 어머니 유보살이 있는 성암사로 내려온다. 그곳에서 오정연은 딸 하연을 낳고, 1980년 5월 광주에 나왔다가 실종되고 만다.

30여 년이 흐른 뒤, 박인하를 비롯한 '저년'(전통 연구회) 멤버들은 대개 '인간의 형질'을 바꾸는 정치판과 현실 속에서 젊은 날의 매혹과 순결을 잃어버리고 체념과 비속함 속에 늙어간다. 박인하는 서클 후배였던 준환을 비서관으로 채용하지만 그를 모욕하면서, 아니 모욕하기 때문에 지독히 증오하고, 오정연과 박인하의 비밀을 눈치 챈 준환은 노예처럼 비굴한 태도와 술만 마셨다 하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개새끼 씹새끼' 등의 욕설을 퍼붓는 난폭한 태도를 오가는 기괴한 인간으로 변질된다. 따라서 이때 등장한 유하연이라는 존재는 과거 박인하의 허물을 수면 위로 떠올리게 하는 불길한 물증이 아니라, 박인하를 비롯한 서클 멤버들이 세월 속에서 잃어버리고 가둬버린 과거 청춘의 꿈이자 순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청춘의 치졸한 객기까지 포함되어 있다.

한편, <레가토>는 이렇듯 시간과 정념의 겹침과 단절 뿐 아니라, 이념의 층위 또한 중요한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이 서사의 핵심이 1979, 1980년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데에서 충분히 암시되고 있다. 작가 권여선은 1980년 5월 딸 하연을 성암사의 어머니 유보살과 이모 권보살에게 잠시 맡기고 나온 오정연을 통해 통념적으로만 알던 금남로의 참상을 다시 한 번 오롯하게 형상화시키고 있다. 오정연은 그곳에서 1979년의 비겁한 자신의 태도와 임신으로 인해 시위 현장을 떠나야했던 자괴감, 박인하에 대한 연모 등을 한꺼번에 쏟아놓으려는 듯, 거침없이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그 시위 현장에서 다친 오정연을 목격하게 된 프랑스 교수 '에르베 리샤르'는 정연을 구하지만 정연은 기억을 상실하고 '에르베'를 따라 프랑스로 떠나게 된다.

결국 <레가토>는 박인하는 유하연이 자신의 딸임을 알게 되고, 프랑스에 영화 촬영 차 간 '전통 연구회' 멤버들과 에르베의 우연한 만남에 의해 오정연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광주 서사의 재현과 추리 서사적 모티브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과거 권여선이 <푸르른 틈새>에서 선보였던 후일담이의 반복이자 진부한 멜로 추리 서사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오정연이라는 실종된 인물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해가면서 과거와 현재의 겹침, 사랑과 폭력의 뒤섞임, 차가운 이데올로기를 덮친 뜨거운 피와 정념의 혼돈을 독기어린 표정으로 독자들 앞에 내놓은 권여선의 문장들에서 '날 것의 인간'을 감각하는 것은 이 작품에서 얻게 되는 하나의 경이이자 신선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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