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행복도 자로 재고 저울로 달까… 억압의 수단인 ‘측정’을 거부하라읽음

문학수 선임기자

▲측정의 역사…로버트 P. 크리스 지음·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356쪽 | 1만8000원

고대 중국은 음악에서 길이의 개념을 이끌어냈다. 위나라 학자였던 순욱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그는 율관(입으로 불어서 기본 음율을 낼 수 있는 통)을 통해 음악의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또 서아프리카 아칸족은 ‘금분동’이라고 불리는, “지구상에서 지금껏 고안된 도량형 중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측정 체계”를 갖고 있었으며, 중세 유럽의 농민들은 삶의 현실과 노동에 뿌리박은 도량형을 개발해 사용했다. 예컨대 “가족을 먹여살릴 만큼의 토지” “소나 말 한 마리를 부려서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땅의 넓이” “한번에 씻을 수 있는 굴의 양” “젖소 한 마리에게서 한번에 짜낼 수 있는 젖의 양” 같은 것들이었다.

물론 근대에 들어서면서 도량형은 ‘통일’됐다. 1789년 혁명 직후 프랑스 아카데미는 “도량형의 난맥상이 정신을 혼란시키며 상거래를 저해한다”면서 도량형 개혁안을 국민의회에 제출했다. 마침내 “리브르(무게)도 하나, 투아즈(길이)도 하나”라는 원칙에 따라 ‘미터법’이 제정된다.

[책과 삶]행복도 자로 재고 저울로 달까… 억압의 수단인 ‘측정’을 거부하라

이 새로운 측정법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이라는 보편성을 기치로 내세우며 세계로 확장됐다. 물론 프랑스가 제출한 아이디어를 영국은 거부했고, 미국은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뉴욕의 스토니브루크대학 철학과 교수인 저자는 “도량형은 한 사회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며 “문화, 사회적 역학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핵심 개념”이라고 전제한다. 그리하여 그는 ‘측정’이라는 앵글을 통해 인류의 문명사를 되짚는다. 물론 그 역사는 복잡다단하다. 문화와 정치, 예술과 과학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까닭이다.

특히 흥미를 끄는 부분은 측정의 역사와 관련한 인간의 드라마다. 식민주의적 도량형을 거부하고 아프리카의 가치를 지키려 했던 니앙고란-부아, 도량형의 개정을 놓고 갑론을박했던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들, 자오선에서 자연 표준을 찾기 위해 항해했던 과학자들, 예술작품으로 미터법을 조롱했던 마르셀 뒤샹, 미사일 경쟁을 벌였던 미국과 소련의 정치가들, 심지어 속옷 구조 모델들까지 등장해 ‘측정의 역사’라는 건조한 주제를 다채롭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마르셀 뒤샹은 “과학에 치우친 문화적 여건에서 어떻게 예술에 의미를 부여할지를 고민했던 인물”이다. 특히 뒤샹의 작품 중에 ‘정지한 세 표준’(1913~1914)은 미터법에 대한 조롱으로 해석된다. 이 야릇한 작품은 뚜껑이 열린 낡은 크로케용 나무 상자, 그 속에 들어 있는 길고 얇은 유리 슬라이드 두 쌍, 뱀처럼 구부러진 길다란 실, 널빤지 두 조각 등을 진열해 놓고 있는데, 뒤샹 스스로도 “미터에 대한 농담”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저자는 뒤샹이 “(미터법으로 대표되는) 규약주의를 금과옥조가 아니라 단지 선택의 문제로 생각했다”고 강조한다. 그와 같은 뒤샹의 관심은 ‘거대한 유리, 또는 독신남자들이 발가벗긴 신부, 그조차도’(1923)라는 작품에서 절정을 이뤘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뒤샹이 두 누이를 위해 작곡한 ‘음악적 오류’라는 곡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우연과 4차원, 예술과 일상적 사물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뒤샹의 작품”에 대해 “세계를 구성하는 은밀한 규약과 체계를 작품 속에서 까발려 이들이 영구적 고정물이 아니라 약속에 불과함을 폭로했다”고 평한다.

애초에 세상에는 자도, 저울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삶을 영위하고 세상을 해석하기 위해 온갖 사물에서부터 인간사의 모든 것까지를 견주고 재왔다. 거리와 시간, 땅에서 나는 모든 것들의 생산량은 물론이거니와 거래의 공정함을 확보하려는 기준도 측정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뤄져왔다. 결국 “도량형은 한 사회가 우주만물을 해석하고 인간의 삶과 일상을 보여주는 척도로 자리했으며, 문명의 본질적 요소로 격상됐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물론 저자는 그 문명의 배후에 깔려 있는 폭력성과 정치성, 아울러 측정에 대한 광신도 간과하지 않는다. 세계를 점령한 미터법은 “프랑스 군대의 총검”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제 인간은 측정 세계에 대한 거의 무의식적인 신뢰,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다고 믿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행복이나 삶의 질까지도 자로 재거나 저울로 달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얘기다.

책의 말미는 측정에 사로잡힌 현대사회에 대한 성찰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면서 “현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세상이 자신을 측정하라고 어르고, 측정 이외에는 의미를 찾을 방법이 없다고 구스른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이제 측정은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에서, 세상에게 나를 이해시키기 위한 도구로 바뀌었다는 의미로 읽히는 문장이다. 그래서 저자가 내리는 마지막 결론은 매우 도발적이다. 그는 “오늘날 절대 선으로 간주되고 있는 측정은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며 “자아를 파괴하는 사악한 억압의 수단”이라고 강조하면서 “측정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권면한다. 그것이 바로 물리학과 철학을 함께 전공한 저자의 마지막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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