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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인 줄기, 패인 나무에서 생명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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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인 줄기, 패인 나무에서 생명을 말하다

[청춘의 고전 시즌2] <세한도>에 피어나는 생명의 기운

겸재 정선의<금강전도>와 '주역' - 조민환(춘천교대 교수)

<산에서 나는 향기는 동해 밖에 떠오르고, 끄 쌓인 기운은 온 누리에 서렸다.

꺾인 줄기, 패인 나무에서 생명을 말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는 강원도 정선 두위봉에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평 용문사에 1,100년 된 은행나무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두위봉 주목나무가 1400년 된 것으로 밝혀졌다. 천 년 이상 살아온 나무도 놀랍지만, 아프리카 바오밥나무의 수령은 최고 5,000년가량 된다. 인류사로 어림잡아도 5,000년이라는 시간은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만년을 넘게 산 나무가 있다면 과연 믿어지는가?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에 그런 나무가 있다. 무려 12,000년 이상을 산 이 소나무의 이름은 '므두셀라'. 그는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모습으로 5,000년, 고목의 모습으로 아직도 7,000년째 살고 있다. 줄기가 죽은 듯 보이지만, 여전히 잎이 나고 해마다 1cm씩 성장한다.

우주에 호응하는 법을 깨친 것일까? 오래 산 나무들이 견뎌온 시간은 기적을 넘어선다. 우리가 모르는 자연의 지혜가 있는 것만 같다. 세월을 간직한 나무 대부분은 잎이 풍성하지도 않고 줄기가 곧지도 않다. 심지어 고목의 색은 검고 가지들은 꺾여 흉해 보이기까지 한다. 나무의 중심 줄기마저도 거센 비바람에 둥글게 패이고 버티다가 결국 꺾이기도 한다. 그도 아니면 바위틈에 자라거나 땅 위에 누워 자라기도 한다. 심하게 아플 때면, 알 수 없는 혹주머니 하나 다는 일도 감수해야 한다. 벌레의 등살에 차가운 시멘트로 덧칠되기 수차례, 세월이 길수록 나무색은 짙어지고 나이테는 조금씩 늘어난다. 이것이 긴 세월을 이겨낸 나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 노송 ⓒ조민환

5월 12일, 상상마당을 찾은 조민환 교수는 나무의 이 당연한 자연스러움에 주목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생명의 원리를 찾아 옛 그림들을 주역으로 풀어낸다. 흥미롭게도 그가 강연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그림과 사진은 그래서 푸르고, 바른, 평이한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줄기가 부러지거나 움푹 패여 보기만 해도 힘겨운 모습이었다.

조민환 교수는 이러한 노송의 모습이 특히 추사의 <세한도>에 자세히 묘사되었다고 본다. 원래 사제간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유명하지만, <세한도>에서의 노송은 자연의 강인한 정신도 담고 있다. 얼핏 보기에 힘없고 초라해 보이는 노송이 꺾이고 휘어져도 생명을 멈추지 않는다.

▲ 김정희 <세한도>,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23.7*108.2cm

"가지가 잘리고 옆으로 휜 나무는 고난을 극복하며 위로 자라려 한다. 하지만 위로부터 몰려온 풍파로 말미암아 다시 엄청난 고통의 시기를 보낸다. 나무는 닥친 시련을 또 다시 극복해야만 하는 생명의 연속성을 보여준다"고 조민환 교수는 말한다.

처음에 노송 줄기는 옆에 있는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위로 곧게 뻗어 있었다. 그러나 너무 바른 탓인지 거센 풍파를 이겨낼 힘이 없어 곧 꺾이고 만다. 이제 노송의 다른 줄기 하나가 굵게 자라지만, 다시 몰려온 풍파에 휘어지고 이도 힘에 부쳐 점점 가늘어진다. 시련이 계속될 때마다 아래로 향하는 줄기, 그럴 때마다 다시 솟구치는 새로운 줄기. 이렇게 굽이치길 몇 차례, 마침내 노송에게도 희망의 봄은 싹튼다. 그런데 이 봄은 사그라질 줄 모르는 봄이다. 가지 끝에 난 희미한 솔잎들이 겨울이 되어도 생명으로 거듭난다. 마치 추사의 인생길처럼 말이다.

고단함 속에 숨어있는 강인함, 이름없는 수많은 고목과 <세한도>의 가지가 간직한 기적의 힘이다. "가지는 미약하지만, 나무는 그 미약함을 새로운 생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조민환 교수의 말대로 바로 여기에서 그 기적의 힘이 발현되고 있다.

끝자락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힘

자연이 보여주는 강인함은 생명력의 회복 또는 극복에 있다. 꺾일듯 꺾일듯하지만 시련을 이겨내는 힘이 있어 고목 줄기는 생명 줄기로 재탄생한다. 조민환 교수는 이러한 만물의 이치가 주역의 '지뢰복괘'(地雷復卦) 사상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긴다.

'지뢰복괘'는 땅에 우레 같은 힘이 솟구치는 형상이다. 맨 위에 음 세 개가 땅을 상징한다면, 맨 아래에 양 하나가 봄을 채비한다. 홀로 애쓰는 양의 움직임은 우레의 놀라운 힘을 상징한다. 양의 기운으로 비로소 음의 기운이 다하니 절기로 따지면, 동지(음력 11월, 양력 12월 22일)다. 고난과 어둠이 다해야 양이 회복(復)하므로 이 괘는 머지않아 언 땅에 봄이 올 형세다. 추위의 절정이 지난 후 봄의 기운이 싹트는 것처럼, 우레의 힘은 땅의 가장 아랫부분에서 뚫고 올라온다. 봄이 오기까지 하나의 '양' (_)이 고된 시련을 희망으로 바꾸기 시작한다. '지뢰복괘'는 미미한 작은 기적으로부터 큰 기적으로 변해가는 생명의 '길'(吉)한 이치다.

불사조 같은 자연의 강인함 – 사군자

자연의 강인함은 주역 사상뿐 아니라 인간의 예술혼에도 담겨있다. 조민환 교수는 사군자를 고난과 역경을 품어낸 자연정신이 예술로 승화된 것으로 본다. 가장 쉬운 사군자의 예가 5만 원권 지폐 뒷면에 담긴 매화와 대나무이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 같지만, 사실 이 그림은 이정의 <풍죽도>와 어몽룡의 <월매도>가 겹쳐졌다.

대나무의 상징은 푸른 잎과 곧은줄기다. 여름날 대나무는 가장 시원하고 싱그럽게 느껴진다. 한편 이른 봄부터 피어나는 매화는 봄의 전령사다. 설사 눈이 내리더라도 꽃을 피운다. 그래서 풍기는 향기가 더욱 그윽하고 청아하다.

대나무는 땡볕 더위에도 마르지 않고, 매화는 강추위에도 여지없이 자신의 생명력을 뿜어낸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그들은 어두운 시간을 인동초처럼 감내해야 했다. <풍죽도>와 <월매도>는 바로 그런 시절의 그림이다. 바위 위에 단단히 서 있는 대나무, 그는 매서운 북서풍을 맞아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매화나무는 상한 밑동 아래로부터 가지 세우는 일을 밤에도 그치지 않는다. 둥근 달이 그의 고독한 일을 알고 찾아와 가지 끝을 향해 길을 내준다. 그들은 고난을 의미 있게 그리고 기꺼이 맞이하고 있다.

사군자의 굳건한 정신은 여러 그림 중에서도 특히 추사의 <난맹첩>에 절묘하게 녹아있다.
▲ 추사 김정희 <난맹첩> ⓒ간송미술관

난초는 환경에 좌우됨 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은은한 향기와 청초한 자태를 간직한다. 선비들은 그런 난초의 고고하고 순수한 정신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런데 추사의 <난맹첩>은 다르다. 난초의 줄기들은 섬세하고 세련되게 그려지지 않았다. 필선이 너무 단순한 나머지 무성하게 자란 잡초 같다.

또한, 이 그림에서 점들은 여기저기 들쑥날쑥 찍혀있다. 겨울에 얼어붙은 줄기일까? 이 난도 향기를 풍길 수 있을까? 그림에서 꽃 모양 같은 부분을 제외하고는 줄기 대부분이 진한 먹색으로 강하게 그려졌다. 묵색의 명암대비가 뚜렷하다. 흐릿한 색의 문양들은 마치 잡초 같은 난 줄기를 둥그렇게 감싸는듯하다. 난 줄기는 일반적으로 얇고 긴 선모양으로 아름답게 그려지지만, 추사의 것은 바늘처럼 삐쭉삐쭉, 억세고 거칠다. 그런가 하면 난 아래 글자들은 난초가 뿌리 내린 땅을 연상시킨다. 윗줄에 있는 글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해보면, 조민환 교수의 말대로 흙표면이 고르지 않은 언덕모양이다.

그는 이런 추사의 미학을 '문자 예술'이 보여주는 '화제의 조형성'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그 조형미가 추사의 필법에 어우러져 있다고 말한다. "온산 눈 덮혀 가득하고 강물은 얼어서 난간 되었네. 손 잡힐 듯 부는 봄바람에 어찌 하늘 뜻 모르리오." 조민환 교수가 말한 바로 이 화제에 '간'(干)자는 원래 아래 획이 짧은 것이지만, 위에 획보다 길게 표현되었다. 다시 말해 위, 아래가 뒤바뀐 것이다. 한겨울 돌덩이처럼 단단히 얼은 얼음이 온 세상을 길쭉하게 누은 듯 뒤덮은 형태라고 그는 해석한다. 추위가 극에 달해 쇠하려는 순간, 사람의 손끝(人)에서는 봄의 기운이 느껴지고 싹이 솟아날 태세다(春). 즉, 양기가 위로 치켜 올라가는 모양새다. 바람(風) 속에서도 벌레들은 벌써 봄을 감지하고 땅 위로 나가야 할지를 고민한다. 봄소식에 이내 어깨춤이 절로 나 (乃), 마음이 미소 짓는다 (心).

추사의 문체 하나하나에는 그림의 까닭이 담겨있다. 그에게서는 글과 그림의 경계가 무너져 화제의 형상미가 생동한다. 보이지 않는 힘은 난의 굵은 힘이다. 어두운 땅속에 묻혀있는 '양'(__)의 기운이 아지랑이 되어 피어난 천심(天心)이다. 그래서 '천심난도'다. 난이 꽃 필 때까지, 고목에서 새싹이 날 때까지 어려운 시간 동안 자연에는 고난을 '아는' 지혜가 있다. 이것이 곧 조민환 교수가 이번 강연을 통해서 전하고자 한 '지뢰복괘'의 숨은 뜻이다.

* 6월 9일에는 황희경 영산대 교수가 '제6강 삶을 완성하려는 자, 여백을 즐겨라 - 팔대산인의 묘석도(猫石圖)와 선불교'를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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