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에 대한 폭력 공론화할 수 있도록 문단도 조직화해야”

심혜리 기자

‘문단 내 성폭력, 어떻게 볼 것인가’ 전문가 좌담

김재련 변호사, 김민정 시인, 양경언 평론가, 최은영 소설가(왼쪽부터)가 지난 11일 경향신문이 마련한 문단 내 성폭력 사태 관련 좌담회에 참석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김재련 변호사, 김민정 시인, 양경언 평론가, 최은영 소설가(왼쪽부터)가 지난 11일 경향신문이 마련한 문단 내 성폭력 사태 관련 좌담회에 참석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최근 불거진 문단 내 성폭력 사태로 문학 출판시장이 위축되는 등 여파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를 본령으로 하는 소설가와 시인들에 의한 성폭력은 독자들에게 배신감과 분노를 안겼다.

피해자들의 전례 없는 폭로는 해시태그 ‘#문단_내_성폭력’과 함께 확산되며 그동안 성역으로 생각돼왔던 문단 내 권력구조를 뒤집어보고, ‘원로’나 ‘문인’이라는 권위 뒤에 가려진 작가들의 민낯을 드러나게 했다. 이후 사태와 관련해 아카이빙 작업이 시작되고 문제의식을 공유한 작가들의 모임 ‘페미라이터’가 생겨나는 등 변화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좀 더 심층적으로 문단 내 구조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대안을 논의하기 위해 전문가 좌담회를 마련했다. 지난 11일 경향신문사에서 진행한 좌담회에는 김민정 출판사 ‘난다’ 대표(시인), 김재련 변호사, 양경언 평론가, 최은영 소설가 등이 참여했다. 김 변호사는 문화예술계 성폭력 사건을 다뤄왔다.

김민정 출판사 ‘난다’  대표, 김재련 변호사, 양경언 평론가, 최은영 소설가(왼쪽부터)

김민정 출판사 ‘난다’ 대표, 김재련 변호사, 양경언 평론가, 최은영 소설가(왼쪽부터)

■한국문단의 권위적인 시스템

사회자=내부에서 봤을 때 문단 내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고유의 구조적 문제나 특수성이 있다면.

최은영=독자 입장에서 한국문학이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라고 생각해왔고, 특히 여성 독자로서 불쾌하고 힘들 때가 많았다. 일부 남성 작가들은 문학작품에서 아직도 성폭력을 그냥 ‘섹스’로 그릴 때가 많다. 가해자의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런데 그런 비판을 하면 소수의 의견으로 치부됐다. 최근 성폭력으로 논란이 된 한 시인이 사과문에서 “학생들과 성관계를 했다”고 썼는데, 그것은 엄연히 권력을 이용한 성폭력이다.

양경언=가해자들은 자신이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약자들, 나이가 어리거나 갓 등단한 작가들을 골라가면서 괴롭혔다. 그래서 사건이 더 은폐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심지어 ‘문학을 하려면 탈선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 시인도 있었다. 자유로운 성관계가 문학이나 예술활동의 수단이어야 하는 것처럼 얘기할 정도다.

김민정=한국은 특히 작가 전담 에이전시가 없고, 작가들이 출판사를 옮겨 다니는 경우가 있다 보니 출판사에서 작가를 ‘모셔와야’ 하는 구조일 수밖에 없다. 외국계 출판사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데, 외국은 한국과는 다른 양상이라고 들었다. 작가들이 유능한 에디터를 좇으면서 오랜 파트너십을 발휘하는 문화라고 하더라. 영국의 편집자 다이애나 애실이 대표적 경우다. 또 중·고등학교 때부터 글을 쓰겠다는 학생들이 많은 한국의 상황도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글쓰기가 대학에 진학하는 수단의 하나로 활용되기도 하니까 가해자들은 ‘문단’의 권위를 내세워 피해 학생들에게 악용했다.

■익숙한 상황에 새 언어 부여한 페미니즘

사회자=성폭력은 문단 내에선 수십년간 계속돼왔는데 공론화되지 못했다. 어떤 계기로 터져 나왔다고 보나.

김민정=강남역 살인사건도 있었지만, 올해 들어서 유독 페미니즘을 다룬 책들이 많이 읽혔다. 우리 삶을 해석해낼 ‘텍스트’가 생긴 것이다. 내가 데뷔했을 때만 해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 자체가 없었다. 지금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그 역할을 한다.

최은영=페미니즘 책이 많이 읽히면서 여성들에게 언어를 줬다고 본다. 그동안 문제 상황을 적확히 언어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피해자가 언짢고 불쾌해도 성폭력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또 그 전까지는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보통 문인 한 개인의 성적 일탈이나 비윤리성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이번엔 트위터에서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공론화되면서 공동체에서 발생한 일로 우리 모두가 연루된 일이라는 책임감이 부여됐다.

양경언=당사자들이 공적인 공간에서 용기를 내서 발언함으로써 주변인들이 그냥 그들을 타자화해서 연민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게 만든 것도 의미 있다. 사람들이 그동안 폭력인지 모르고 넘긴 상황조차 다시 바라보게 했다. 실제 문청들의 입에서 문제가 터져 나온 것도 주목해야 한다. 가장 열악한, 제대로 자신의 발언권을 확보하지 못하는 자리에 있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이 직접 입을 열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학의 소비자로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언어를 구성해나가는 주체로 나선 것이다.

사회자=일부 출판사에선 해당 시인의 시집을 출간 정지했다. 저작물은 사건과 함께 봐야 할까, 별개로 봐야 할까.

김민정=최근 도서관에 갔는데 사서가 “(성폭력 문인과 관련해) 출판사에서 금서 목록을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더라. 이런 일이 발생하면 독자들이 출판사로 전화해 “환불하라. 피해를 보상하라. 절판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양경언=어떤 독자들은 “내가 어떤 사람의 작품을 좋게 봤는데, 그 작가 알고 보니 쓰레기였잖아. 대체 나는 뭘 본 거야”라며 자신의 독서 경험 전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출판사에서 일률적으로 조치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법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관련 저작물들의 출판을 잠시 유보할 수 있을 것 같다.

최은영=이번에 문제가 된 한 시인의 경우 시집 안에 성폭력 피해자를 연상할 수 있는 시가 있어서 2차 가해를 할 수 있다. 그런 책은 폐기해야 한다고 본다.

김재련=기본적으론 부적절한 성적 범죄행위를 한 사람과 그 사람의 저작, 출판 활동을 구분해서 보는 것이 맞다. 다만 문단 내에서 특정 저작물이 가질 수 있는 2차 피해 등에 대한 위험을 공론화하면, 작가와 그 저작물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도 자연히 뒤따르게 된다.

■권익침해 공론화할 집단적 기구 필요

사회자=현재 논의되고 있는 구체적인 방지책이 있나.

김민정=20년 가까이 문단에 있으면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대응할 수 있는 집단적 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개인으로 흩어져 있어 구성이 쉽지 않았다. 대응할 수 있는 기구를 조직하고, 관련 내용을 공유할 수 있는 잡지를 만드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또 작가들과의 계약서상에서 성폭력과 관련해 추가할 수 있는 조항들을 상의 중이고, 연말에 으레 있는 작가들과의 술자리 문화를 바꾸려고 한다.

양경언=최근 문단이나 학계 내에서 자신이 겪거나 목격한 성폭력, 권력의 문제들이 쏟아지는데 이 논의들을 실천적 운동으로 가져가기 위한 적절한 창구나 기구의 필요성을 느낀다. 신뢰할 수 있는 작가들이 기구를 구성해서 관련 사실들을 아카이빙하고, 실제적으로 해결을 위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성폭력에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일부 작가들이 ‘페미라이터’라는 그룹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김재련=그동안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에 대한 대처가 다른 분야와 달랐던 것은 각개전투로 전개돼왔기 때문이다. 작업 특성상 집단보다는 개인 중심의 일이 많고, 도제식이다. 또 문제제기를 했을 때 피해자가 그룹 내에서 조용히 배제될 가능성이 높아 침묵하는 경우도 많다. 결론적으로 문화예술계에서도 조직화가 필요하다. 조직화되면 피해자가 입게 될 불이익이나 권익침해에 대해 훨씬 더 수월하게 공론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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