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사법독립과 약자보호…사법은 국가의 양심이다

주영재 기자

이즈미 도쿠지, 일본 최고재판소를 말하다

이즈미 도쿠지 지음·이범준 옮김 |궁리 | 424쪽 | 2만5000원

[책과 삶]사법독립과 약자보호…사법은 국가의 양심이다

현재 일본에서 활동하는 재일 한국인(자이니치) 변호사는 100명을 훌쩍 넘는다. 일본 법조계에 ‘한류’가 뻗어나갈 수 있었던 데는 40년 전 한 재판관의 노력이 있었다.

1976년에 일본의 사법시험에 합격한 김경득은 사법연수소의 입소 조건이었던 귀화를 거부하고 한국 국적 그대로 입소하겠다고 신청했다. 당시 최고재판소 인사국에서 일하던 이즈미 도쿠지 전 최고재판소 재판관은 “해오던 방침을 이유로 신념대로 살려는 청년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최고재판소 재판관회의가 김씨를 채용하도록 배후에서 노력했다.

이즈미 도쿠지는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법조인으로 꼽힌다. 최고재판소 재판관으로 있던 6년3개월 동안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소수의견을 냈다. 그 소수의견의 상당수는 이후 판례 변경으로 다수의견으로 바뀌었다.

자이니치 인권변호사인 배훈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그의 반대의견의 배경에는 다수자와 강자는 소수자와 약자를 차별하고 억압하기 쉽다는 인간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 그리고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재판관으로서의 확고한 직업윤리가 있다.”

<일본 최고재판소를 말하다>는 이즈미가 정년퇴임 후에 쓴 책이다. 사법의 독립성을 지키고 약자를 보호하려는 ‘소수의견’의 역사를 담고 있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 공포 이래 약 130년간 일본 사법역사의 주요 장면을 조망하며 사법제도의 문제점과 발전방향을 이야기한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최고재판소의 소극적인 위헌 심사를 문제 삼으면서 헌법재판소 설립 이후 한국의 헌법재판 발전상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를 소개하기도 한다.

저자는 정의에 맞는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이 사법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사법이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 지름길은 “재판관이 헌법이 부여한 역할을 충분히 인식하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입법·행정의 재량권 행사를 적절히 심사하며 기업의 행동규범을 정하는 일에 적극 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현실은 이상과 같지 않다. 1891년 일본을 찾은 러시아 황태자에게 검을 휘둘러 부상을 입힌 순사에게 황실죄를 적용해 사형을 시키라는 정부의 압박을 물리치고 법에 따라 무기징역을 선고하게 한 대심원장은 결국 검찰의 공격에 사퇴해야 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는 군부는 전시상황을 이유로 사법 독립을 위협했다. 이에 맞서 당시 도쿄공소원 부장이던 오노 쇼고 판사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공정한 재판이다. 정부에 영합하는 것은 사법부 정신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사법은 곧 국가의 양심’이라는 선언이었다.

일본 헌법은 이달로 공포 70주년을 맞는다. 그간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은 이 헌법은 ‘평화헌법’으로도 불린다. 9조에서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의 무력 사용과 위협을 포기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개정 대상으로 삼은 조항이다.

한·일 양국에서 개헌 논의가 이야기되고 있다. 다만 그 초점이 한국은 권력구조의 개편,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의 변화에 맞춰져 있다. 이즈미 도쿠지는 소수자를 보호하고 민주주의를 치유하는 헌법을 강조한다. 개헌 논의에서 우리가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이 책은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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