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인터넷 시대에 사라져 가는 서점들. 내로라하는 대형 서점들이 문을 닫고 사라져 간다. 헌책방은 존재감이 더 없어지고 있다. 30만 도시 여수에서도 <형설책방>(여수시 동문로 36, 경찰서 옆)이 유일하다. 이곳 헌책방에서 지난 4일 이색 공연이 펼쳐졌다.

서가의 좁은 통로에서 펼쳐지는 이색공연. 청중은 10여명이지만 이들 공연의 진짜 청중은 헌책 22만권
▲ 정원자(55) 소리꾼과 고수 오정님(35)의 헌책방에서의 소리공연 서가의 좁은 통로에서 펼쳐지는 이색공연. 청중은 10여명이지만 이들 공연의 진짜 청중은 헌책 22만권
ⓒ 오병종

관련사진보기


여수의 소리꾼 정원자(55)씨가 들려주는 <흥보가> 중 강남 간 제비들의 여행기인 <제비노정기>가 북장단에 실려 헌책방 좁은 통로 서가의 고서적들을 흔드는가 싶더니, 이어서 남도 민요 <함양 얌잠가>도 헌책갈피에까지 흥으로 퍼진다.

"너는 죽어 삼월동풍에 매화가 되거라. 나~는 주~욱어서 아이가~이가 벌나비 될거나. 에야 디야~ 에헤야 에~ 헤~ 두견이 울음 운다.  두둥가~ 실실 너 불러라"

헌책방에서의 이색 공연은 지난 3월부터 매월 한 차례씩 열려 벌써 8번째다. 여수를 지키며 자랑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여 알리는 팟캐스트 <똑소리 닷컴> 대표 한창진(60)씨가 곧 사라질지 모를 이 헌책방과 시민들을 연결해 주는 작은 공연을 주선해 왔다.

지난 3월 풍각쟁이 DJ 박종일부터, 4월에는 독서운동가 이명선, 5월에는 시인 신병은, 6월에는 색소폰 연주자 백충화씨 등등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에게 부탁해 십시일반 자발적인 공연으로 이날 작은 소리마당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빈 공간이면 어디든 책으로 가득하다. 2,3층에 처음에는 사무실 공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공간이 책을 보관하는 수장고다. 개인적인 관심으로 모아둔 책이 이제는 공공자산이 되었다.
▲ 2층 올라가는 계단까지 지나가는 통로를 제외하고는 온통 책이다. 빈 공간이면 어디든 책으로 가득하다. 2,3층에 처음에는 사무실 공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공간이 책을 보관하는 수장고다. 개인적인 관심으로 모아둔 책이 이제는 공공자산이 되었다.
ⓒ 오병종

관련사진보기


꽉 들어찬 책 때문에 공간이 협소하다. 공연 전에 책방 주인은 손수레로 통로에 놓인 책들을 옆 빈 건물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찾아온 사람들의 자리와 공연 공간 확보를 위해서 매번 그렇게 한다고 한다. 40평 3층 건물 <형설책방>에 빼곡히 들어찬 헌책은 무려 22만 권이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이 책방을 접으려고 하면서, 도대체 몇 권인지 돈으로 환산해보려고 세어 봤죠. 억울해서 얼마인지나 알고 싶었죠. 그랬더니 20만 권이 넘더라고요. 한 권 당 적게 잡아도 '아! 나는 부자구나' 하면서 서점 접겠다는 생각을 접은 겁니다. 이 책들 보세요. 제가 부자 아닌가요?"

헌잭방의 어려움은 입시제도 변천, 교과과정의 변화에 민감하다. 참고서 주기가 2~3년이면 바로 못쓰게 되는 재고문제가 크다. 대입 논술비중이 낮아지면서 그나마 찾던 수험생 발길이 끊기면서 헌책방 마지막 고객까지 없어졌다.
▲ 형설책방 주인 조화익씨 헌잭방의 어려움은 입시제도 변천, 교과과정의 변화에 민감하다. 참고서 주기가 2~3년이면 바로 못쓰게 되는 재고문제가 크다. 대입 논술비중이 낮아지면서 그나마 찾던 수험생 발길이 끊기면서 헌책방 마지막 고객까지 없어졌다.
ⓒ 오병종

관련사진보기


어머니가 운영한 적 있는 헌책방의 추억 탓인지, IMF 때 울산에 있는 외국계 화학 회사를 그만두고 남원에서 2년간 헌책방을 운영했다. 그후 여수로 옮겨 지금까지 14년째 <형설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조화익(55)씨의 얘기다. 22만 권. 좁은 건물에서 고객들에게 책을 어떻게 안내할까?

"여기 책들은 저만 알죠? 도서분류 방식 중 나름대로 대분류만 했습니다. 분류된 서가를 넘치게 되면 기존 분류에서 여기저기 흩어집니다. 그러니까 저만 알죠. 14년간 했으니까요."

헌책방이다 보니 오는 손님은 없고, 혼자 유유자적하게 보내면서 <형설책방>의 또 다른 자산인 수 천장의 LP판으로 자주 음악을 듣는다는 조씨. 그윽한 옛 음반으로 음악 감상까지 하는 그를 보고는 손님들은 으레 그가 건물 주인일 거라고 여긴다. 손님도 별로 들지 않아 벌이도 없는 헌책방을 유지하고 있으니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생계걱정이라곤 하지 않는 부잣집 출신 멋쟁이 문화인 정도로.

하지만 그는 건물주에게 월세 미납으로 내용증명 우편물을 받았으며, 보증금도 바닥나고 있는 처지다. 그런데도 조씨는 인내와 사명감으로 버티고 있다.

"6~7년 전부터 차근차근 주변 헌 책방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더니 달랑 두 집 남았는데, 어느 날 그 분이 또 접더라구요. 그 분까지 그만두니까 결국 여수에서 헌 책방은 달랑 이곳만 남게 된 겁니다. 그래서 나 혼자라도 지켜야겠다. 의무감, 사명감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런 게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지금까지 끌고 온 겁니다." 

책을 깨우는 작은 행사에 다섯 번이나 참석한 여수시 교동 노재성(57)씨는 여수에서 멀쩡한 대형 서점도 없어져 가고, 더구나 헌책방으로는 여수에 유일하게 남았는데 사라지지 않을까 조바심에 걱정이다.  

"카페 문화로 연결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22만 권이라면 훌륭한 문화콘텐츠 아닌가요? 독지가가 나서주거나 어떤 묘책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뭔가 문화공간으로 확대되었으면 하고 이렇게 자주 옵니다."

모든게 기부와 자원봉사로 이뤄지다보니 제때 제대로 홍보하는 것은 어렵다.11월 공연은 지역 가수 이동원과 함께 했는데, 12월 공연때도 플래카드는 그대로였다.
▲ 11월 공연때 붙은 플래카드가 그대로다 모든게 기부와 자원봉사로 이뤄지다보니 제때 제대로 홍보하는 것은 어렵다.11월 공연은 지역 가수 이동원과 함께 했는데, 12월 공연때도 플래카드는 그대로였다.
ⓒ 오병종

관련사진보기


지금까지의 헌책방 살리기 공연을 추진해온 한창진씨는 이런 이색 공연이 궁극적으로는 '헌책방 도서관'까지 갔으면 한다. 22만 권이라는 '문화 콘텐츠'를 살리자는 얘기다. 이 책방은 구도심이다. 그래서 원도심 공동화로 고심하는 자치 단체들의 도시재생 프로젝트와도 맞아 떨어진다고 그는 주장한다.

"여유있는 공공시설을 지자체에서 제공해 주면 새로운 형태의 옛 서적이 전시된 '헌책방 도서관'이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시민 문화공간 뿐 아니라, 잘 유지되면 관광기능도 하게 될 겁니다."

8개월째 헌책방 행사가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는지 조씨에게 물었다.

"많진 않지만 시민들이 와서 격려해 주고 찾아와 준 점이 고맙죠. 여수시청 도서관 관계자도 찾아와서 현황 파악 차원인지 이것저것 물어 보고 갔습니다. 또 시 의원들도 들러 대화를 나누다 갔거든요.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서 다행이죠."

여수 형설책방. 여수에 하나 남은 헌책방이다. 거기서 책을 일깨우는 작은 공연들이 몇 번 있었다. 작은 문화운동으로 바로 달라졌을까? 당장은 아닐 것이다. 여느 헌책방처럼 사양산업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긴 매한가지다. 문이 닫혀질 위기에 있는 것 또한 그대로다.

하지만 이제 서서히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22만 권 헌책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책이 살아날지 모른다. 그러면 형설책방 22만 권은 단순한 헌책 그대로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형설책방, #조화익, #헌책방 도서관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