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정의는 아주 단순하다 또 새로운 개념도 아니다

백승찬 기자

부의 재분배, 반전, 소수자 옹호로 ‘일관된 35년’…그가 던지는 메시지의 울림

버니 샌더스의 정치혁명 | 버니 샌더스 지음·홍지수 옮김 |원더박스 | 416쪽 | 1만8000원

버니 샌더스의 모든 것 | 버니 샌더스 지음·이영 옮김 |북로그컴퍼니 | 328쪽 | 1만5000원

“국민들이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도 국민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 법안을 거부하고 이 나라의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 가족, 무엇보다도 우리 아이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보다 나은 법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저는 이제 물러나겠습니다.”

[책과 삶]정의는 아주 단순하다 또 새로운 개념도 아니다

2010년 12월10일 오후 7시, 백발의 정치인이 미국 상원회의장 발언대에서 비틀거리며 내려왔다. 당시 69세였던 그는 식사를 하지도, 화장실에 가지도 않고 8시간37분간 연설을 이어갔다. 회의장에는 보좌관과 직원들, 중계진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회의장 바깥에서는 난리가 났다. 정치인의 사무실에는 격려 전화와 e메일이 쇄도했다. 연설 동영상의 조회수가 폭발했고, 각 언론은 기사를 쏟아냈다. 이 정치인은 이후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고, 지금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버니 샌더스(74) 이야기다.

이날 샌더스의 필리버스터는 부자 감세 조치를 2년간 연장하는 법안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선거기간 내내 전임 부시 정부의 감세정책을 비판했던 버락 오바마는 대통령이 된 뒤 이 정책을 연장시키려 했다. 거대 양당인 민주당, 공화당이 밀어붙이는 법안을 막을 힘이 무소속 샌더스 상원의원에게는 없었다. 샌더스는 법안 표결을 3일 앞둔 이날 법안 통과에 반대하는 이유를 전 미국에 알리고자 했다. 부자 감세가 아니라 부자 증세여야 하며, 그 돈은 기반시설에 투자해 일자리를 창출해야 하고, 이를 통해 중산층 붕괴와 빈곤층 증가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 필리버스터 연설의 골자였다.

1962년 시카고대학의 인종평등회의 모임에 참석한 샌더스(오른쪽).  2010년 12월10일 필리버스터 연설에 앞서 상원 회의장으로 향하는 샌더스.  2015년 11월21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한 고아원을 방문한 샌더스.(위로부터) University of Chicago Library·AP Images·연합뉴스

1962년 시카고대학의 인종평등회의 모임에 참석한 샌더스(오른쪽). 2010년 12월10일 필리버스터 연설에 앞서 상원 회의장으로 향하는 샌더스. 2015년 11월21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한 고아원을 방문한 샌더스.(위로부터) University of Chicago Library·AP Images·연합뉴스

백악관은 이날 샌더스의 필리버스터에 적지 않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오후 4시쯤 오바마는 클린턴 전 대통령과의 비공개 만남에 관한 기자 브리핑 시간에 아예 클린턴을 대동해 기자들의 주의를 돌리려 했다.

2016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과정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버니 샌더스에 관한 책 2권이 나란히 나왔다.

<버니 샌더스의 모든 것>(원제 The Speech)은 이날 필리버스터 연설을 번역한 책이다. 통상 필리버스터 연설은 전화번호부를 읽거나 노래를 하는 등 시간을 끄는 수단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샌더스는 이날 별다른 대본 없이 자신의 이전 연설과 관련 자료들을 총동원해 연설했다.

<버니 샌더스의 정치혁명>(원제 Outsider in the White Houes)은 1997년 나온 샌더스의 자서전이다. 샌더스의 성장과정과 정치 이력, 특히 정치적 고향인 버몬트주 벌링턴 시장 시절의 이야기들이 많이 담겼다. 미국 내 샌더스 바람 때문에 미국에서도 올해 개정판이 나왔고, 샌더스가 서문도 새로 썼다.

[책과 삶]정의는 아주 단순하다 또 새로운 개념도 아니다

샌더스는 1941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가난한 페인트 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카고대학 재학 시절 진보적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군소 진보정당인 자유연합당의 후보로 버몬트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매체들은 거대 양당 후보들에만 관심을 가질 뿐, 군소정당이나 무소속 후보들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했다. 샌더스는 양당과는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이를 널리 알리진 못하는 제3당의 역할과 한계를 동시에 깨달았다.

한동안 정치를 떠나 개인 사업을 하던 샌더스는 1980년 버몬트주 최대도시 벌링턴 시장 경선에 무소속 후보로 나서면서 정치인으로 복귀했다. 미국에서도 보수적인 버몬트주 유권자들이 진보적인 무소속 후보에 호의적일 리 없었다. 하지만 샌더스 진영은 각 선거구의 투표 성향을 분석했고, 밑바닥부터 표를 다졌다. 저소득층 거주 지역 대표, 대학교수, 환경보호주의자, 재산세 인상을 우려하는 보수적 주택 소유자 등 다양한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샌더스는 처음부터 ‘교육’이 아니라 ‘승리’를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미 전역에서 유일하게 거대 양당이 아닌 무소속 시장으로 선출됐다.

버몬트 시장 4선, 미국 연방 하원의원 8선, 미국 연방 상원의원 재선의 정치 이력 동안 샌더스는 자신의 견해를 숨기거나 모호하게 표현한 적이 없다. 이라크전에 반대하다가 보수진영으로부터 매국노 취급을 받았고,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했고, 탐욕스러운 1%의 거부들을 격한 언어로 비난했다. 샌더스는 말한다. “민주당 의원들이 내게 선거에서 이기려면 보수적이어야 한다, 신중해야 한다고 할 때마다 돌아버리겠다.”

그래도 샌더스는 이겼다. 그는 탁상공론하는 급진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었다. 덕분에 보수적인 경찰 노조부터 빈곤층 시민까지 유권자의 고른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샌더스가 여성의 임신중절 권리,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걸 알면서도 그를 지지하는 보수층이 적지 않다. 샌더스는 항상 주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사실 샌더스의 메시지는 35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최고의 부유층 15명이 하위 40% 국민보다 많은 것을 소유한 체제는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월스트리트의 사기꾼들’을 비난하며, 인권을 옹호한다. 정적들은 “샌더스는 똑같은 얘기만 주구장창 해대서 따분하다”고 비난한다. 샌더스는 답한다. “그들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반면 극소수가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소유하는 현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샌더스가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돌풍을 일으키고는 있지만, 힐러리 클린턴을 제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다. 결과야 어찌 됐든, ‘샌더스현상’의 의미는 분명하다. “정의는 그리 복잡한 개념이 아니다. 새로운 개념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 그리고 한국에서 심각한 우려를 낳을 만큼 벌어지고 있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 감당하기 어려운 대학 등록금, 여성 차별, 지구 온난화, 전쟁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면, 샌더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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